한국 경제가 지난 해 12월부터 전대미문의 나락에 빠졌다. 36년간의 일제 통치와 한국전쟁의 폐허에서 시작했으면서도 한국 경제는 지난 30년간 연 7~8퍼센트의 지속적인 성장을 거듭해 세계 10위권의 경제로 진입했으며, 일인당 1만불이상의 소득을 구가했고, OECD 가입등으로 기세를 올렸다 그렇지만 지난해 초부터 한보, 기아 등 대기업들의 연쇄적인 부도사태로 흔들이더니 급기야 외환위기를 맞으면서 주저앉고 말았다. 동아시아의 ‘기적’이 동아시아의 ‘환상’이 되어 버렸다.

이번 상황은 거래의 중단, 수출입의 중단, 이자율 폭등, 달러의 급격한 유출 등으로 국가부도를 초래할 정도의 중대성을 띠고 있다. 또한 환율폭등과 가격폭락으로 인해 불과 한 달 사이에 한국에서 생산되는 모든 상품과 금융자산이 반이나 4분의 1 값으로 재평가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상황은 성장율이나 수출이 다소 줄어들거나 실업이 약간 늘어나는 경기둔화나 침체가 아니라 공황으로 규정되어야 할 것이다. 이와 비슷한 상황은 지난 70년대에 발생한 두 차례의 유류파동에서 찾아볼 수 있으나 그 심각성이나 복잡성에 있어서 비교할 바가 아니다.

흔히 사람들은 공황을 전쟁으로 비유한다. 공황이나 전쟁이나 모두 극도의 궁핍한 경제파탄을 가져온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그렇지만 전쟁이 우리의 재산과 자본을 물리적으로 파괴하는데 비해 공황은 순전히 사회 경제적인 메카니즘에 의해 자산의 가치를 상실케 함으로써 유사한 효과를 가져온다. 이런 이유로 전시와 달리 공황이 발생하는 경우 ‘피신’이나 ‘피난’이 불가능하다. 더구나 전쟁에 비해 공황은 훨씬 더 복잡한 현상으로서 그 현상으로서 그 원인과 대책에 있어서 지적인 노력이 요구된다.

서구 경제에서는 이런 상황이 이미 여러 차례 반복되었다. 지난 1720년대 이와 같은 현상이 두 차례 발생했으며, 19세기에 들어서는 거의 10년마다 반복되었고, 지난 1930년의 대공황을 통해 가장 극단적으로 나타났다. 주요 특징으로 기업의 도산, 상품 및 실물자산의 가격 폭락, 이자율의 폭등, 화폐에 대한 광적인 집착, 어음이나 주식및 채권의 휴지화 그리고 금이나 달러의 급격한 유출 등을 들 수 있다.

공황에 대한 인식과 이에 대한 대책도 19세기초부터 논의되어왔다. 서양의 경제사상전체에 적용될 수 있는 시장경제론, 케인즈적 입장 그리고 급진주의적 입장의 대립이 공황을 인식하는데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시장 경제론자들이 기본적으로 시장을 신뢰하기 때문에 공황이 농산물의 흉작, 유류파동, 독점, 노조간의 대립 그리고 특히 외생적인 화폐공급이 변동 등 외적인 충격에 의해 발생한다고 본다. 또한 일단 공황이 발생하면 그것이 소진될 때까지 내버려 두는 것이 자본주의적 정의에 맞는다고 생각한다. 만약 정부가 구제금융등을 통해 개입하는 경우 비효율적인 기업이나 은행이 살아 남게 되어 경제주체들을 ‘도덕적으로 해이’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산불이 나는 경우 태울 것을 모두 태우고 산불이 저절로 꺼지게 해야 생태계가 유지된다는 논리와 같다. 이런 입장이 근대 경제학의 통화주의를 거쳐 IMF의 입장을 구성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비해 케인즈주의자들은 공황 혹은 자본주의의 불안정이 외적인 충격이 아니라 금융 부문을 중심으로 한 투기 등 내적인 요인에 의해 발생한다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거대한 정부와 통화정책을 통한 개입을 주장하게 된다. 특히 공황이 발생하는 경우 투기를 일삼아 부채비율이 높아진 불건전한 기업 뿐만 아니라 건전한 기업도 도산하기 때문에 이들을 살리기 위해 어느 정도 이자율을 높이더라도 자금은 충분히 공급되어야 한다고 본다. 또한 경제 전체적으로 여파가 큰 대기업의 붕괴를 막기위해 그 손실을 사회 전체가 책임지는 ‘사회화’과정도 불가피하다고 본다. 이런 입장에서는 이자율의 폭등을 방관하는 IMF의 처방이 수정되어야 한다. 물론 구제금융이나 추가적인 자금 공급은 분명히 어느 정도의 시차를 두고 물가의 앙등을 낳게 되므로 이에 대한 대책도 함께 요구된다.

이런 논의들이 주로 금융 및 외환시장에 촛점을 맞추고 있는데 비해 한국에 부과된 IMF의 이행사항에는 기업의 지배구조및 노동시장과 관련된 것도 있다. 동구 및 구소련등 이행 중인 경제에 대해 IMF가 요구했던 구조조정이 우리에게도 그대로 연장된 것으로 보인다. 이런 관점에서 급진주의적인 입장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급진주의적인 입장에서는 금융 공황을 포함해 공황이 자본주의에 내재적인 것이며 그것을 국가의 힘에 의해 구제하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불가능하다고 본다. 최종적으로 자본주의는 붕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입장을 수긍하지 않는 경우에도 세계 자본주의의 차원에서 공황으로 인한 부채의 발생과 이로 인한 IMF의 개입이 한 국가의 주권을 침해하고 이들이 갖고 있는 재정정책 및 통화정책상의 자율성을 억압한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이러한 억압으로 고이자가 지속됨으로써 생산기반이 붕괴되고 선진국 금융자본의 지배를 받게 된다. 또한 IMF가 강요한 내핍정책은 저소비와 저임금 구조를 낳게 되어 해당 국가는 자신이 생산한 부가가치를 선진국 경제의 유통부문에 헌납하는 처지가 된다는 것이다.

이런 입장중에서 어떤 것이 타당한지는 아직 분명치 않지만 일단 공황이 내적인 요인에 의해 발생했다는 점, 그것이 금융 및 외환부문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점, 그리고 IMF체제는 한국의 주권과 경제적 자율성을 침해할 정도로 깊히 개입했다는 점, 그리고 IMF체제는 이자율의 급상승을 허용해 한국 경제의 생산기반을 손상시키고 있다는 점 등이 인정되어야 할 것이다.

더구나 IMF 체제로 인해 죄없는 노동자들이 거리로 내몰리고 있다. 책임 소재를 따지자면 이러한 사태를 발생시킨 것은 기업인들과 경제관료라고 생각된다. 그렇지만 보다 근본적인 책임은 우리 경제의 실체를 파악해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경제학자와 사회과학자들에게 있다고 생각된다.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미국 경제의 틀에 맞추도록 강요받고 있다. 예전과 같이 우리의 학자들은 사태를 예견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임금과 일자리에 대해 걱정할 뿐 이에 대해 크게 고민하지도 않는다.

홍 훈

우리대학교 상경대 교수(경제학과.경제학)로 재직 중이며, 저서로는 ‘맑스 경제사상의 구조와 한계’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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