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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연세문화상] 희곡부문 당선작


라면 먹는 두 사람

구성미(국문·06)

등장인물

이무진(여. 26)
이완수(남, 38)

*

핀조명이 무진을 비추고 있다. 트렁크를 들고 문 앞에 서 있는 무진. “딩동.” 초인종을 누른다. “딩동, 딩동딩동.”

무진 저기요. (좀 더 크게) 저기요! 누구, 없어요? 없어요, 아무도?

어디선가 들리는 완수의 목소리.

완수 (목소리) 육팔공오!
무진 네?
완수 (목소리) 육. 팔. 공. 오. 비밀번호. 눌러요.

무진, 비밀번호를 누른다.
무진이 문을 열면, 무대 완전히 밝아진다.

화장대, 침대, 옷장, 식탁 등으로 이뤄진 가구세트와 돌침대, 자개농 등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완수 (목소리) 문 좀 열어줄래요?

무진, 옷장 앞에 서 있다.
옷장 문 앞에서 노크하는 무진. 소리가 없자 다른 옷장 문을 노크한다. “똑똑.” 완수의 응답. “똑똑.” 문을 여는 무진.

완수 안녕하세요?
무진 안녕, 하시죠?

뻐꾸기시계 소리 들린다. “뻐꾹 뻐꾹, 자정입니다.”

완수 점심, 드실래요?
무진 중천에 떴겠네요. 달이요.

각기 다른 컵라면을 챙겨 오는 완수. 부산히 움직인다. 바닥에 퍼질러 앉는 무진.

완수 (정수기에서 물을 받으며) 정량만?

고개를 끄덕이는 무진. 라면 익기를 기다리는 두 사람.

완수 해파리가 채소예요?
무진 채소는 밭에서 나는 거구요.
완수 미역은?
무진 해초.
완수 해초예요, 해파리?
무진 아마도, 동물?
완수 해파리냉채할 때, 그 해파리가? 썰어놓은 해파리 말예요, 걘, 청초한 게 꼭 채소 같 아요.

천장에서 들리는 쥐 소리.

완수 얘들이 쟤 먹을 시간이라고. (웃는다) 어떤 걸로 드실래요?
무진 남는 걸로…….
완수 (라면 건네며) ‘너구리’ 먹어요. 근데요, 너구리도 식용하죠?
무진 먹으면, 먹는 거죠.
완수 안, 먹어요?
무진 아직, 안 투명하잖아요, 면이.

라면 먹는 완수. 잇따라 젓가락질하는 무진.

완수 전 완수예요, 이완수.
무진 무진이에요. 이무진.
완수 무진기행? 김승옥!
무진 리무진이요. 리무진 타는 사람 되라고.
완수 리무진, 많이 타나 봐요? (손으로 트렁크를 가리킨다) 공항버스. 리무진이라고 부르 잖아요, 공항버슬.
무진 한 번은 타겠죠, 리무진. 다들 그러잖아요. 누워 있을 거예요, 차에. (사이) 영구차 요.
완수 영구란 사람이 있다 쳐요. 이 사람한테 차도 하나 주고. 근데 이 사람, 차를 엉망 으로 대놨어. “이 차 누구 거야?”
무진 영구, 차요. (웃는다)
완수 영구 씨 리무진 타겠네, 리무진 씨. (웃는다)
무진 (라면 먹으며) 익었네요, 라면.

다 먹고 일어서는 완수. 그런 완수를 물끄러미 보는 무진.

완수 기다리는 데 3분. 먹는 데 3분.
무진 라면 많이 먹어요?
완수 하루에 두 개씩 먹기도 하고. 두 끼 먹는데.
무진 제가요, 지하에 살았거든요. 반지하. 창문을 열면 사람들 발목이 보여요. 횡단보도 앞이었어요, 우리 집이. 아니, 우리 방이. 2분마다 발목이 왔다 갔다 해요. 창틀에 컵라면을 놓고 신호가 바뀌길 기다렸어요. 녹색등이 들어올 때 라면을 휘젓는 거예 요. 푸른 신호가 한 번 더 들어올 때 입맛을 다셨고. 신호등이 깜빡깜빡. 그 순간, 꼭 누가 차도로 뛰어들어. 위험하게.
완수 내가 그래요. 중앙선에 서 있은 적도 있었다니까. 멀뚱멀뚱.
무진 (젓가락질하며) 젓가락으로 요렇게 집어서 인도에 내려주고 싶다 그랬어요, 그럴 땐.
완수 라면 불었겠다.
무진 차도에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뚜껑을 열었어요. ‘컵라면 뚜껑? 컵라면 뚜껑을 딴 다?’ 우스웠어요, 그게. 별 것도 아닌데. 괜히 웃어요. 더운 김이 서려서 희뿌옇 게 된 안경을 쓰고서. ‘내가 낀 안경에 낀 안개. 안개?’ 또 한참 웃고.

형광등 깜박거린다. 일어서는 무진.

무진 (트렁크를 끌며 나간다) 많이 파세요.
완수 차 끊겼어요.
무진 한 번 타볼래요? 리무진 말고 이무진.

조명 몇 번 깜빡거리다, 완전히 어두워진다.

* *

돌침대가 없어진 것 외에는 달라진 것이 없는 무대. 무진, 트렁크를 들고 서 있다.

무진 완수야.

무진, 트렁크를 열어 옷가지를 정리한다. 옷들을 옷걸이에 거는 무진. 옷들은 퍽 더럽고 낡았다.

무진 완수야.

무진, 의아한 듯 주위를 둘러본다.

무진 이완수, 이 웬수. (웃는다)

옷걸이에 걸린 옷들을 안고 옷장으로 향하는 무진. 문을 열면 옷장 안에 완수가 서 있다.

완수 (신발을 벗으며) 다녀왔습니다.

무진, 완수가 벗어놓은 신발을 가지런히 한다. 무진의 품안에서 떨어지는 옷들. 바닥에 떨어진 옷은 안중에 없어 보이는 무진. 무진은 완수가 재킷을 벗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완수의 옷을 개어 자신의 팔에 걸쳐놓는 무진. 앞서 가는 완수의 어깨를 터는 무진. 이들은 퇴근해 집에 들어오는 남편과 이를 맞아주는 아내의 모습을 흉내 내고 있는 것이다.

무진 별일, 없었죠?

완수는 침대에 걸터앉으며, 넥타이 푸는 시늉을 한다.

완수 애들은?
무진 날 못 재워 안달이에요.

천정에서 쿵쾅거리는 소리(쥐 소리)가 들린다.

완수 엉큼한 것들.

무진, 옷장 앞에 널브러진 옷들을 지금 막 발견했다는 듯 놀란다.

무진 이것들. 옷을 막 벗어두고.
완수 올라가볼까?
무진 에비! 애들이 겁주는 소리가 안 들려요, 당신은?
완수 에비!
무진 에비!

천장에서 들리는 찍찍대는 쥐 소리. 무진과 완수, 마주보며 웃는다. 무진, 떨어진 옷들을 주워 옷장에 건다. 다시 두 사람 앞에 펼쳐진 현실.

무진 내가 존대해도 넌 반말이더라. 부부 흉내 낼 때.
완수 혼잣말한 거야, 혼잣말.
무진 사귈 땐 완수 씨 무진 씨. 완수 씨는 결혼해도 여전히 완수 씬데, 무진 씨는 무진 이야, 그냥 무진.
완수 여기 서른여덟. 거기 몇 살?
무진 (완수와 자신을 번갈아 가리키며) 너? 사람. 나? 사람. 어른. 어른. (사이) 아이스크 림 대신 아이크림이 좋아지는 나이, 스물여섯. 내 나이.
완수 사줘?
무진 응. 아이스크림. 퍼 먹는 거. 투게더 바닐라맛.
완수 아이크림이 더 좋대며?
무진 알면서. 나 세수 잘 안하는 거.
완수 (무진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고양이 세수.

무진, 고양이 울음소리를 낸다. 천장에서 쿵쾅대는 쥐 소리 들린다.

완수 우리 애들 도망가겠다.

완수와 무진, 웃는다. 침대에 나란히 앉아 있는 두 사람. 하릴없이 발을 놀린다. 무진, 완수의 발을 보고는 옷장으로 다가간다.

완수 신발장엔 왜?
무진 신발장? 옷장!

무진, 완수의 신발을 들고 완수 곁으로 간다.

무진 신어.

일어서는 완수. 완수의 키를 훑어보는 무진.

완수 봐, 이거 키 높이 양말이야.
무진 작아, 그래도.
완수 작은 게 어때서?
무진 (섰다, 앉았다 한다) 장신, 단신. 장점, 단점. (사이) 꼭 그렇진 않지. (웃는다)
완수 꼭 그렇진 않지.

무진, 완수에게 신발을 신겨주고, 완수는 벗어던진다. 이 같은 상황이 되풀이된다.

무진 신어, 신발.
완수 바닥 깨끗해. 닦았어, 물걸레로, 싹.
무진 화장실, 물걸레로 닦아. 깨끗해, 안 깨끗해? 맨발 벗고 가, 안 가?
완수 자꾸 신고 있으면 닳잖아. 봐, 낡은 거.
무진 바닥, 찬데…….
완수 히터 어디 있을 텐데…….

히터를 찾아 돌아다니는 완수.

완수 (뭔가 깨달았다는 듯) 팔월이잖아.
무진 그래. 팔월. 추워. 온몸이 으슬으슬. 땀이 다 나.

무진 앞에 선풍기를 놓아주는 완수.

완수 우리랑 반대편 나라들은 겨울이지, 지금? 걔들은 팔월이 겨울인가? (사이) 아닌가. 지금 십이월이야,걔네들?

완수의 신발을 신겨주는 무진.

무진 니가 “차 끊겼어요.” 그랬을 때 왜 눌러 앉았게? 여긴 가게잖아. 가게에선 신발을 신고. 난 신발 벗는 거 싫어. 서양 애들 좀 봐. 절대 안 벗잖아, 신발. 집에서도.
완수 (신발을 벗어 냄샐 맡아보며) 신발인가? 양말? 발? 냄새, 나지? 발에서 썩은 내가 나. 고약해, 아주. 뼈에서 나나? 헌혈도 못하겠어. (웃는다) 신발 한 번 못 벗었어, 종일. 손님이 코만 킁킁거려도 심장이 쿵쾅쿵쾅.
무진 (코를 먹으며) 킁킁. 코감기였겠지. 그 손님 말야.
완수 집에 돌아온 사람들은 맨 먼저 신발부터 벗잖아. 다들 벗고 있지, 집에선 신발을. 냄새가 좀 나도.

완수, 신발을 벗는다. 이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무진. 무진, 양말도 벗겨준다. 트렁크에서 짐을 뒤적이는 무진.

무진 없어, 한 장이. 완수야. 전화 좀 걸어. 팬티한테. (웃는다)
완수 하나 줘? 삼각도 있어.
무진 내 냄새야. 팬티 냄새. 니 코 괴롭힌 거.
완수 내 거야, 냄새.

무진, 완수의 팔을 잡아끈다. 팔짱끼고 있는 무진과 완수.

무진 완수야. 우리 산책하자, 꼭. 시월 오면. 좋을 거야, 날씨.
완수 시월이 오고 싶대? (웃는다)
무진 살아 있음 꼭 온다. 살아만 있으면 돼. 올 거야. 나 살아 있고, 너 살아 있으면.

사이.

무진 (손가락으로 꼽는다) 일월 이월 삼월 사월 오월 유월. 칠월 팔월 구월 시월. 십일월 십이월. 육월? 십월? 유월. 시월. 육월? 고기 냄새 난다.
완수 삼겹살.
무진 십월?
완수 십월? 씨벌? (웃는다)
무진 시월엔 은행나무지. 가시는 걸음걸음마다 은행잎이 쫙. (사이) 냄새날 거야. 은행 냄새. 지독해. 우리 이완수 또 (겨드랑이에 코를 대고) ‘나한테서 나나?’ 안전부절 못하겠지. 속으로 끙끙. 내내 전전긍긍. (사이) 은행냄샌데. 그냥 은행냄새.

무진과 완수, 팔짱을 끼고 걷는다.

완수 무진아, 냄새나. 은행 냄새.
무진 맞아. 은행 냄새.

무진, 자신의 소지품에서 뭔가를 찾아낸다.

무진 (동전 두어 개를 내밀며) 짠! 내 전 재산. (동전을 신발에 둔다) 냄새 안 날 거야. 특효야, 이게.

완수, 동전이 든 신발을 빼앗는다. 동전을 꺼낸 뒤 신발을 멀찍이 둔다. 완수, 동전을 던져 신발에 넣는다.

완수 골인! 유원지에서 그러잖아. 소원 빌면서.
무진 (동전 던지며) 사방천지가 담배꽁초로……. (동전이 빗나간다) 에이.

무진, 호주머니에서 꽁초를 꺼낸다. 불 붙여주는 완수.

완수 막 주워 물지 마.
무진 (꽁초 보여주며) 봐봐. 립스틱 묻었지? 남자 건 안 태워.

무진, 다 태운 담배꽁초를 호주머니에 넣는다. 완수, 무진의 호주머니에 담배 몇 개비를 넣어준다.

무진 뭐 빌었어? 아까.
완수 나 열 살 때 오백 원짜리 동전이 나왔어. 분명 열 살이었어. 식구끼리 처음으로 놀 러 갔거든, 동물원에. 나 태어난 지 십 주년이라고. (웃는다) 아부지가 오백 원짜리 를 내 손에 꼭 쥐어줬어. 연못 앞에서. 한가운데 있는 절구통을 조준하라는 거였지. 엄만 입이 댓발 나왔어. “자장면이 한 그릇이요.”
무진 “자장면이 한 그릇이요.”
완수 “치다봐라, 완수야. 요 학 안 있나? 학이 (날개짓하며) 요래 날아간다. 우리 완수 소원 물고.”
무진 “오백 원이 다 뭐꼬? 십 원만 해라. 십 원엔 다보탑 있다.”
완수 (호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 다시 던진다) 좀 들어가라, 제발. (빗나간다)
무진 “내, 뭐라 했노? 봐라. 날던 학이 고꾸라지삤네.”
완수 절구통에 동전 넣는 게 소원이었어. 들어가면 이뤄지고 튕기면 안 이뤄지고. 정직 했지. 저녁에 돈까스를 먹기로 돼 있었어. 경양식. 케이크에 초도 꽂고, 불도 끄고. 아침에 케이크 꺼냈다가 도로 넣었거든. 어두울 때 초 켜야 멋있다고. (사이) 그 날 물에 밥 말아 먹었어. 잔뜩 불어터진 얼굴을 하고서.

무진, 호주머니에서 초코파이 하나를 꺼낸다. 초코파이에 담배 한 개비를 꽂는 무진.

무진 (담배에 불을 붙이며) 짠!

담배를 집어 피우는 완수.

무진 불 안 끄고 뭐해? (완수가 입에 문 담배를 뺏는다) 금연!

‘후~’하고 담뱃불을 끄는 완수. 무대, 어두워진다.

* * *

형광등 깜빡깜빡. 무대에 불 들어오면, 무진, ‘딱’하고 박수를 친다. 그런 무진을 쳐다보는 완수.

무진 모기.
완수 엇! 불 들어왔다!
무진 갈아, 형광등 좀.
완수 모기향 피울까?

무진, 트렁크로 가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낸다.

완수 뭐해?

무진, 쭈그린 채로 휙 돌아본다.

완수 간 빼 먹어? 꼭 구미호같이.
무진 (완수에게 스타킹을 던지며) 선물!

완수, 스타킹 한쪽을 뒤집어쓴다. 나머지 쪽에 머리를 끼우려는 무진.

무진 양파 같아. 망에 든 양파. 아니다. 머리가 크니까 수박? (완수머리를 두드리며) 맛 이 덜 들었어.
완수 (무진의 머리를 두드리며) 맛이 갔어. 제철인데. (웃는다)
무진 아직도 비 맞으면 자랄 것 같다. 빗속에 너무 오래 서 있어. 곯는 줄도 모르고. (웃 는다)
완수 곰삭은 맛! (사이) 스타킹도 신어? 통 안 입잖아, 치마는.
무진 주웠어, 화장실에서. 화장실 휴지통은 휴지만 넣으라고 있는 거잖아. 오줌 닦은 거 , 똥 닦은 거, 코푼 거. 거기다 얠 버리면 얜 뭐가 되니?
완수 스타킹으로 닦았나보지.
무진 모기 많더라.
완수 모기장? 섹시하네, 그 모기장. (열려 있는 휴지통 뚜껑을 닫으며) 얜 닫으면 1첩 반 상, (쓰레기통에 올라가며) 올라서면 사다리. (뚜껑을 열며) 열면 좌변기. (스타킹을 벗어 휴지통에 넣는다) 쓰레길 담으면 쓰레기통. 이것이 이놈, 본연의 모습!

완수, 무진을 업어 침대로 간다. 두 사람, 침대에 눕는다. 이때 침대는 수직으로 세워진다. 사실상 완수와 무진은 서 있는 셈. 뒤척이는 두 사람.

무진 비닐 찢어졌다!
완수 이 침대, 팔지 말까?
무진 안 팔면?
완수 댓바람부터 침댈 보러 왔어. 여자야. 혼자 왔어. 남편이랑 갈라서겠대. 다른 건 몰라도 침댄 바꿀 거래. 더블만 봐. 싱글은 안 보고. 앉았다가, 누웠다가……. 엉덩 이도 튕겨보고. 나한테 물어. “저기요, 혼자 자면요, 좀 춥나?”
무진 “저기요, 혼자 자면요, 좀 춥나?”
완수 “가만 보자…… 8월이니까…… 시원할걸요.” 조용히 시트만 매만져. 강아지 쓰다듬 듯. 개시하나 싶었는데, 갑자기 이 여자, 자리에서 벌떡! 인상 팍!
무진 쓰레기봉투 깔고 했잖아. 제일 큰 걸로. 100리터짜리. 얼룩졌어?
완수 ‘체모가 싫어요!’ 작전 실패. 손톱 끝에 털이 걸렸나봐.
무진 예뻤어?

완수, 고개를 끄덕인다.

무진 손톱 말이야. (사이) 잘랐겠네, 그 여자. 손톱 말이야.
완수 인사는 잘하더라. 그 와중에도.
무진 “많이 파세요.”
완수 ‘많이 파세요’라니. 가구점에서.

무진, 옷장 안에 옷을 모두 꺼내 트렁크 안에 넣는다. 완수, 무진을 쳐다본다.

무진 가방 안 싸두면 잠이 안 와. 학교 다닐 때부터 그랬어. 시간표 따라 교과서 챙기 고, 연필 깎아놓고. 샤프 안에 심 넣어두고. 일기예보도 꼭 보고 자. 흐린다고만 해 도 우산 챙겼어. 그걸 또 펼쳐보고. 우산이 안 펴지지는 않는지, 대가 망가지지는 않았는지.

완수, 우산을 내민다.

완수 비 온대, 내일.

우산을 펼쳐보는 무진.

무진 못 쓰는 거 없어? 귀퉁이 찌그러진 거.
완수 못 쓰는 걸 왜 둬?
무진 (자신을 가리키며) 여기. 도통 쓸 데라곤 없는 위인 있잖아. (웃는다)

우산을 접고 트렁크를 끄는 무진.

무진 나는야 옷장을 들고 다니는 여자.
완수 나는야 옷장을 들고 다니는 여자의 남자.

빗소리가 들려온다. 무진, 우산을 편다. 우산 안으로 뛰어드는 완수.

무진 멀쩡한 우산을 쓴 노숙자는, 좀, 격이 안 맞지, 아무래도.
완수 공항 가는 사람 같아.
무진 (‘머리 어깨 무릎 발 무릎 발’ 자세로) 기름진 머리, 어깨에 내려앉은 비듬, 무릎 나 온 바지, 낡은 신발. 어디를 어떻게 다니는지 무릎은 흙구덩이야. 걸을 때마다 먼지 가 폴폴. 이래도?
완수 오랜, 아주 오랜 여행에서 돌아온 여행자. 아직 시차 때문에 길에서 조는 여행자.

무진, 우산을 접는다.

무진 입 가리면서 말하는 노숙자를 보면 좀 그래. 소변 보고 나와서 비누로 손 닦는 노 숙자를 봐도…….
완수 …….
무진 침대, 나 줄 거야? 진짜?
완수 자는 사람이 임자지.
무진 우리 집, 내가 먹고 자던 우리 집. 예경동 150-1번지 지하. 보증금 100에 월세 15. 그거, 우리 집이었을까. (사이) 침댄 처음이야. 이름표를 딱! 이무진. 26세.
완수 환자야? 이무진 괄호 열고 26 괄호 닫고. 입원실 침대가 꼭 그렇잖아.

무진, 휴지통으로 간다. 뚜껑 열고 앉아서 볼일 보는 무진.

무진 완수야. 나 변기도 하나 해줘. 샤워기랑 냉장고도. 1000미리 우유 사서 컵에 부어 마시고 싶어. 유리잔에. 나머진 도로 냉장고에 넣어뒀다가 이따 마시고. 쭉 들이키 면 입가에 우유가 묻어. 그때 니가 닦아주는 거야. 퉁바리 주면서. (웃는다) 가스렌 지랑 싱크대도 있으면 좋겠다.
완수 모델하우스였음 좋았을 텐데. 가구전문점 말고.
무진 모델하우스? 가구전문점 말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무진. 무대를 오가며 취조하는 시늉을 한다.

무진 집은 없지만 가게는 있다?완수 먹고 살아야지.
무진 것도 2층에 있다?
완수 버스 타고 오가는 사람만 오라고. 넋 놓고 간판 읽는 사람들, 그런 사람만 오라 고. 이무진처럼. 자가용 탄 사람들은 못 봐. 안 봐.
무진 가구세트 하나. 돌침대. 식탁. 그마저도 팔면 끝! 새 가구는 들이지 않는다?
완수 하나도 못 팔았다.
무진 팔았잖아, 돌침대.
완수 수작이었지. 이무진 옆에 누우려는 수작.
무진 배달도 안 돼.
완수 가구 빼기 무지하기 힘들다. 분명 요 문으로 들어왔는데 나가는 게 쉽지가 않아. 요상하지?

완수 옷장에서 무언가를 꺼낸다.

완수 이무진. 26세.
무진 거처 없음. 떠돌아다님.
완수 현재 이완수 가구전문점에서 기거. 특이사항 하나. 한 여름에 부츠를 신고 있다?
무진 장화야. (웃는다)
완수 둘. 팬티는 벗어도 부츠는 안 벗는다?
무진 화분이야, 이거. 뽑히면 죽어, 나. (웃는다)
완수 (새 신발을 내밀며) 짠! 옮겨 심는 거야.
무진 귀신들은 발이 없다지.
완수 의족 해줄게.
무진 신발 벗기 힘들다, 무지. 나가는 게 쉽지 않아. 요상하지?

뻐꾸기시계 소리 들린다. “뻐꾹 뻐꾹, 자정입니다.”

무진 점심 먹자.
완수 달이 중천에 떴다!

완수, 무진의 눈을 가린다.

완수 눈 감고 기다려.

조명, 어두워진다. 툭탁툭탁 완수가 움직이는 소리.

무진 떠?
완수 아직.
무진 눈만 가리면 뭐해? 콧구멍이 뚫려 있는데.
완수 기대하시라, 오십 가지 재료의 총출동! 40년 전통의
무진 (말 끊으며) 라면 ?

무진의 말과 동시에 조명 들어온다. 휴대용 가스버너 앞에 쪼그리고 있는 두 사람.

완수 기대하시라, 오십 가지 재료의 총출동! 40년 전통의
무진 조미료의 향연!
완수 오십 가지 재료의 총출동! 기대하시라 40년 전통의

완수와 무진, 동시에 각각 “삼양라면” “조미료의 향연”이라고 외친다.

완수 다다익선!
무진 작은 것이 아름답다! 미니멀리즘!
완수 (휴지통 건네며) 미니멀리즘!
무진 아까 오줌 싼 데 아냐?
완수 인도 사람 봐. 밥 먹는 손, 똥 닦는 손이 같니? (휴지통을 뒤집는다) 1첩 반상.
무진 물, 많다.
완수 (냄비에서 물을 덜며) 이건 커피 몫.

라면을 끓이며 대화를 이어가는 두 사람. 무진, 휴지통을 완수 앞에 둔다. 무진은 뒤집은 휴지통 위에 신문을 깔고 냄비를 올린다. 무진, 몇 젓가락 들다가 따로 덜어둔 물에 인스턴트커피를 탄다.

완수 왜?
무진 불었어.
완수 푹 익혀 먹자며? 접때 컵라면 먹을 때.
무진 끓인 라면은 꼬들꼬들. 컵라면은 푹. 끓인 건 퍼지기 쉽고 컵라면은 덜 익기 쉽거 든. 어려운 게 좋아.

무진, 커피 마신다.

완수 커피? 식후 30분 이내에 마시는 커핀,
무진 (말 자르며) 칼슘과 철분을 빠져나가게 합니다. (사이) 빠져나가라고, 마십니다.
완수 이따 영양제 먹기다. (나무젓가락으로 무진이 쥔 종이컵을 휘저으며) 블랙?
무진 검정커피! (멋쩍게 웃는다)
완수 안 쓰냐? (무진이 건넨 종이컵을 받아들어 한 모금 마신다) 어? 달다!
무진 설탕을 넣어도 블랙, 안 넣어도 블랙. 검기는 마찬가지.
완수 (라면 먹으며) 블랙박스, 녀석도 까만가?
무진 아닐걸. 빨갛대, 발견하기 좋게.
완수 (노래로)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무진 (노래로) “어디어디 숨었나. 꼭꼭 숨어라.”
완수 꼭꼭 숨어도, 머리카락은 보여야 되는 법. (무진의 머리카락을 뽑으며) 새치다!
무진 흰머리!
완수 (머리카락을 손에 놓고 불며) 후우.

완수, 무진의 종이컵을 빼앗아 라면 국물을 퍼마신다. 식사를 마치고 일어서려는 완수, 다리가 저린지 다시 주저앉는다.

무진 식탁이 웃겠다.
완수 한정식엔 양반다리지.

완수와 무진 스트레칭을 하면서 대화를 이어나간다.

완수 어디 갔었어?
무진 잤어. 내 자리 알지?
완수 왕돈까스 골목 초입, 그 계단 꼭대기?
무진 왼쪽 끄트머리.
완수 난 싫은데, 계단. 올라갈 때 헉헉, 내려올 때 후덜덜.
무진 좋아, 계단. 침대 같잖아. 앉으면 의자고. 가끔 연단에 올라와 있는 것도 같고.
완수 구를라.
무진 나 되게 잘 자. 떨어지지도 않고. 거기 제법 큰 은행나무가 서 있어. (웃는다) 말이 좀 그렇지? 서 있는 나무라니. 앉아 있는 나무도 있나? 키도 크고 허리둥치도 제법 이야. 여름엔 네 시, 겨울엔 두 시쯤 지나면 내 자리에도 그늘이 드리워. 내 몸을 덮어. (사이) 이불같이.

무진, 침대로 가 눕는다. 무진 위로 그늘이 진다. 무대, 어두워진다.

* * * *

형광등 스위치를 켜는 완수. 무대에 불이 들어온다. 트렁크를 들고 서 있는 무진. 텅 빈 무대.

완수 이상하지? 여기서 눌렀는데 저기서 들어와, 불이. 문 열자마자 톡. 문 닫기 전에 탁. 자기 전에 탁. 일어나서 톡. 알전구는 안 그래. 소켓에 매달린 걸 (흉내낸다) 요 렇게 돌려서. 꼭 방 한가운데 천장까지 와야 했지. 깜깜해서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와당탕탕. 발에 걸리는 건 왜 그리도 많던지.
무진 형광등 새로 했네.
완수 이사를 딱 와서 스위치를 딱 켜는데 불이 딱 안 들어오면, 열이 딱 날걸. (웃는다)

무진, 가구들이 있던 자리를 헤아려본다.

무진 여긴 침대. 이쯤 옷장이 있었지, 화장대도. 완수야. 이것 좀 봐. 침대, 옷장, 화장대. 벽에 적힌 것 좀 봐.
완수 내가 그랬어. 어디 두면 자리 제일 안 차지할까 머리 굴렸지.
무진 가구들…… 따로따로 팔렸다지?
완수 세트로 살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잖아, 여기 오는 사람들. 색시 준다고 화장대 사간 아저씨, 리어카로 싣고 갔어. 이 아저씨, 흥정할 줄도 몰라. 얼마 빼줬어. 얹어놓을 화장품도 사라고. (사이) 밥은 먹고 가야지?
무진 40년 전통? (웃는다)
완수 40년 전통.
무진 버너 있어?
완수 차에 실었구나.
무진 나 분식집 라면 먹고 싶어.
완수 맛있지, 분식집 라면. 꼬들꼬들하고. 집에선 잘 안 되잖아, 그게.
무진 집에선 한 냄비에 넣고 끓이잖니, 라면을. 식구 수대로. 분식집은 달라. 화로에 냄 비가 여러 개 있다. 한 냄비에 하나씩. (사이) 같은 화로에서 함께 끓어도 결국엔 따로 나가지. 가구 같다. 너랑 나 같기도 하고.
완수 또 만날 텐데 뭘. 잔반통에서. (웃는다)

사이.

무진 어디로 가?
완수 넌?
무진 가구점 갈 거지? 가구 사러. (웃는다)
완수 응. 가구 사러. 우리 리무진 씨는?
무진 트렁크를 옷장으로,
완수 계단을 침대 삼아,
무진 그늘을 덮을 거야. 가끔은 샤워도 하고. 산성비로. (웃는다)
완수 신발, 안 벗고?
무진 신발, 안 벗고!
완수 한 번은 동호대굘 건넜다. 이 발로. 바람도 안 불고 대형 트럭도 안 지나가는데 그 렇게 무서울 수가 없어. 지하철만 지나가고. 노란불빛 안에 들어찬 사람들이 또 그 렇게 무서워. 괴물 뱃속에서 소화 안 된 벌레들 같아. 성질 급한 놈이 씹지도 않 고 삼킨 거야. 근데 얘들은 꿈틀대지도 않아. 살아 있는데.
무진 지하철을 탔어. 옥수에서 압구정으로 넘어갈 때였지. 어떤 사람이 다리를 건너. 맨 몸으로 다리 건너는 건 그 사람 하나야. 문 열어 주고 싶더라. “이거 타고 가세요.” (웃는다)
완수 열어 주지 그랬어?
무진 내 맘대로 되나, 그게?
완수 ……인도에 신발 있더라. 인도를 향해 돌려놓은 신발 한 켤레. 얼마 신지도 않은 거.
무진 큰 맘 먹고 신발을 샀다. 부츠로. 개시해야지 하는데 비가 와서 안 신어, 볕이 따가 워서 못 신어. 신문지 넣어서 모셔두고만 있었어, 신발장에. 하루는 내 부츠가 없어 졌어. 작은 언니도 사라졌어. 그게 그렇게 신고 싶었나? 기집애. 종아리가 굵어서 어울리지도 않았어, 그 부츠. 발목은 이뻤는데, 우리 언니. (사이) 뛰어내렸어. 신발 만 벗어 두고. 가죽은 물에 들어가면 끝장이잖아. 귀엽지? 우리 언니 말야. (웃는 다) 가죽만 물에 들어가면 끝인가. 끝장난 건 자기면서.
완수 큰 맘 먹고 가구를 샀다. 신접살림으로. 취향이란 게 뭐 있니, 나 같은 놈이. 기껏 해야 ‘참이슬’이냐 ‘처음처럼’이냐지. (웃는다) 그 사람이 다 골랐어. “이건 어때?”

세간을 들어낸 빈 무대. 그러나 마치 가구가 있다는 듯이 다정스레 살펴보는 두 사람의 모습.

무진 “완수 씨. 어때, 이건?”
완수 “좋아. 멋있다, 그거.”
무진 “그래? 난 저게 나은 것 같은데.”
완수 “그러게. 진짜 그러네.”

마주보며 웃어대는 두 사람.

완수 돌침대랑 자개농은 우리 엄마 선물. 방 두 개짜리 아파트도 계약했어, 전세로. 가구 만 도착했어. 예비 고부지간이 한날한시에 갔다니까. 차사고로. 동호대교에서. 연인 끼리도 아니고 며느리, 시어머니가. 거기다 우리 엄마 과실이네. 죽이고 죽었어, 말 그대로. (사이) 죽이지? 욕심 많은 우리 노인네, 전세금을 노잣돈으로 싹 챙겨가셨 네. (웃는다)
무진 축의금 대신 조의금?완수 청첩장 대신 부고 돌리고. 부곤 디자인이 필요 없잖아. 그건 맘에 들데. 청첩장 고 른다고 몇날 며칠을 고심했는지 몰라. (웃는다)
무진 ……울었어?
완수 우리 엄마, 그 사람한테 엄청 꼬장꼬장했어. 안 좋아했어, 우리 결혼하는 거. 어떻 게 한 자도 안 틀리고 이름이 똑같냐고. 우리 엄마 신용희. 우리 신용희도 신용희. (웃는다) 식장에 써 붙이잖아. ‘신랑 이완수. 신부 신용희.’ 남우세스럽대.
무진 이오카스테랑 오이디푸스?
완수 오이디푸스랑 이오카스테! 안 읽어봐도 알잖아. 지 엄마랑 그렇고 그랬던 이야기. 무진 지 아들이랑 그렇고 그랬던 이야기.
완수 아부지도 일찍 죽고. 우리 아부지처럼. (사이) 원망만 들입다 했어. 신용희 여사가 작정한 건 아닌가 의심도 가고. (웃는다)
무진 물어 볼 수는 없고. 이완수 얼마나 답답했을까.완수 물어봐야만 아나?
무진 물어봐야만 알지.
완수 산 사람이 오해해도 죽은 사람은 그러려니 해야지. (사이) 죽었으니까. (웃는다)
무진 늦가을에서 겨울로, 눈 내리는 거리를, 길거리에 눈이 다 녹아 없어질 때까지 걸었 어. 이 부츠를 신고. 걷고 또 걷고. 봄에서 여름으로, 가을로. 계절이 여러 번 바뀔 때까지. 아니다. 달력이 넘어가도 계절은 안 바뀌지. (웃는다) 춥거나 덥거나 둘 중 하나야. (사이) 매일 다리를 건넜다. 눈 오는 날은 빼고.
완수 비 오는 날도 빼고?
무진 비 오는 날도 빼고. 미끄러져서 풍덩하면 어째. (사이) 기집애. 너무 깝깝했던 거야, 부츠가.

무진, 부츠를 벗는다. 생각보다 잘 안 벗겨지는 신발. 한참을 끙끙대는 두 사람. 무진의 신발과 함께 나가떨어지는 완수. 무진과 완수, 한참을 깔깔거린다.

완수 가죽 벗겨내는 것 같아.
무진 진짜 양가죽이야, 이 부츠. (웃는다)
완수 종일 사우나한 발 같다.
무진 그치? 냄샌 이렇게 독한데.

완수는 천천히 양말이며, 새 신을 신겨준다.

무진 있지, 바다에 안 뛰어들어서 다행이야. 우리 언니 말야. 내가 생선이면 끔뻑 죽는 거 알고. 갈치가 시체 뜯어먹고 막 그런다잖어.
완수 …….

정적을 가르는 뻐꾸기소리. “뻐꾹 뻐꾹, 정오입니다.”

완수 점심 먹자. 진짜 점심.
무진 해가 중천에 떴다! (사이) 컵라면?
완수 그날…… 우리 신용희한테 전화가 왔어. 신용희 여사랑 컵라면 먹었다고. 점심으로. “완수 씨. 어머님이 나무젓가락 쪼개주셨어.”
무진 “완수 씨. 어머님이 나무젓가락 쪼개주셨어.”

대화는 혼선을 일으킨다. 과거 완수와 용희의 대화가 완수와 무진의 대화로 겹쳐진다.

무진 완수 씨. 꽤 가까워졌단 생각이 든다. 우리 두 사람. 남들이랑 라면은 잘 안 먹었잖 아. 맨 초밥만 먹어. 비싼 거. (웃는다)

긴 사이. 간간히 천장에서 쥐 소리만 들린다.

완수 그러나저러나 이제 이별할 텐데…….

사이.

무진 그러나저러나 만날 건데……. 곧 잔반통에서.

무진, 달력을 뜯어낸다. 시월이다. 조용히 웃고 있는 완수와 무진. 두 사람 얼굴 위로 어둠이 드리운다.

연세춘추  chunchu@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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