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엔 음악이 흐르고

 

김연지(경제·06)

 

 

 

알람을 끄려고 휴대폰을 보니 기상청에서 안내 문자가 와 있었습니다. ‘금일 오후 먹물비 강수 확률 80%, 말을 아껴 씁시다.’ 잘 하면 휴강이겠군, 생각하며 입에 칫솔을 뭅니다. 어제 산 알파벳 이니셜 귀걸이를 양 귀에 걸고 집을 나섰습니다. 오른쪽은 A, 왼쪽은 B모양이라 비대칭인 게 마음에 들어서 샀어요. 맑던 하늘은 금세 어두워집니다. 어둑한 허공 사이 어디선가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사이렌이 멈출 때까지 아무 가게나 되는대로 대피해 있어야 하죠. 거리에는 인적이 뜸해졌습니다. 경보가 울리면 회의도, 수업도 취소가 됩니다. 나는 새 귀걸이를 하고 나왔는데 그냥 들어가자니 아쉬워서, 집이 아니라 집 앞 슈퍼로 들어갔습니다. 두 개에 천 원 과자 묶음과 맥주 한 캔을 들고 계산대에 갔습니다. “얼마죠?”, TV를 보던 아저씨는 손가락으로 3과 5를 만들어 보입니다. 화가 난 표정입니다. 아차, 깜빡했다. 나는 합장하듯 손을 모으고 고개를 주억거립니다.

아저씨가 보던 TV에는 동물이 나오는 다큐멘터리가 방영 중입니다. 소리 없이 ‘지금은 침묵의 시간 입니다’라는 자막 옆에 흰 장갑을 낀 여자가 손짓으로 화면을 해설하고 있어요. 고양이가 인공 모래로 자기 배설물을 파묻고 있는 영상입니다. 공식적으로는 먹구름이 가시기 전까지 말을 하는 것이 불법이고요. 모범 시민이라면, 수화나 필담으로 소통을 해결해야 합니다.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사람들은 아마 비공식적으로도 독서나 면벽수행 같은 혼자 하는 일을 하고 있을 거예요. 나는? 물론 자유를 사랑하지만 말을 참는 것만은 못하겠어요.

사람들은 먹물비를 싫어합니다. 기껏 잘 차려입고 나왔는데 새까만 물에 젖은 생쥐 꼴이면 좀 그렇잖아요? 건물이며 차들도 마찬가지예요. 먹물비가 한 번 왔다 가면 때가 낀 것 마냥 까매져서 물청소를 해야 하죠. 요즘은 아예 처음부터 검은색으로 시공한 빌딩들이 대세예요. 자동차 색깔
은 물론이거니와 선팅까지 진한 색으로 하죠. 전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아요. 여기도 검은색, 저기도 검은색, 하늘이랑 색깔을 맞추는 건 좋은데, 세상이 자꾸 어두워지는 기분이 들더라고요. 다양성도 사라지는 것 같고.

제 생각에 사람들이 먹물비를 싫어하는 이유는 먹구름이 글자를 소화해 내는 자정능력보다 글자들이 넘쳐서 포화상태가 되면, 자기들이 한 말이 글자비가 되어서 쏟아져 내리기 때문이에요. 물건 곳곳에 묻은 얼룩이야 씻어내면 되잖아요? 하지만 마음에 묻은 얼룩은 씻을 수가 없어요. 물론 말 때문에 큰 상처를 입는 일은 잘 일어나지 않아요. 이제는 알아서 입조심을 하거든요. 예전에는 먹구름은 있어도 먹물비는 없었대요. “말이 인격을 드러낸다” 라는 말 들어보셨죠. 먹물비는 인류의 인격이 말에 드러나면서 시작되었대요. 사람들 인격이 어느 수준 이상으로 나빠지고, 먹물비가 막 내리기 시작해서 사람들이 적응을 잘 못 하던 그 시절 이야기는 ‘말을 조심해야 한다’, ‘말을 아껴야 한다’ 라는 결론과 함께 매 학년 도덕 교과서에도 실려 있어요. 역대 최다 이혼율, 사망률, 살인율, 범죄율. 그 때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재난영화들이 계속 나오죠. 지금 상영관에는 먹물비가 바다를 까맣게 만들고 그 검은 해일이 육지를 덮치는 <경포대>라는 재난영화가 흥행중이예요.

삼 년째 매주 일요일엔 자원봉사를 나가고 있죠. ‘하얀세상’이라는 단체인데요, 주로 벽이나 도로에 말라붙은 글자비를 닦아내는 일을 해요. “죽어버려.” “이 개 같은 자식아.” 가끔 이런 욕들이 먹구름의 포화상태를 넘어서 글자비로 내리는데요, 그게 그대로 벽에 딱 달라붙으면 미관상도 정서상도 교육상도 안 좋잖아요. 이 봉사활동을 시작한 계기는요, 제가 아시다시피 말을 좀 못 참아서요. 먹물비가 내릴 때마다 죄책감이 들거든요. 속죄하는 기분으로 하는 거예요. 전 비가 오면 좋기도 해요. 먹구름이 가시고 나면 좀 마음 편히 말할 수 있으니까요. 적어도, 다시 구름이 글자로 검게 더럽혀질 때까지 한동안은요.

내가 뱉은 글자는 하늘에 올라가서도 내 주변을 맴돈대요. 먹구름에 소화되지 못하면 내 옆으로 떨어진답니다. 우리 할머니도 먹물비랑 글자들이 함께 쏟아졌을 때, 남편이랑 시장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남편이 정부랑 주고 받았던 밀어들이 쏟아져 내렸대요. 평생 자기한테는 무뚝뚝해서 키스 한 번 해 본 적 없었다는 할아버지가 애인과 주고받았던 글자비들이 할머니 몸 위로 쏟아지는데, 꼭 유리조각이 와서 박히는 것 같았대요.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요, 가엾은 할머니.

글자비는 내리는 순간만이 아니라, 글자 그대로 바닥이며 건물 외벽에 문신처럼 박혀 오래오래 남아요. 누구는 얼굴이 못생겼다는 둥, 내가 누구를 속였다는 둥 글자비의 흔적은 곳곳에 남아서 사람들을 상처 입혀요. 나도 상처를 입어요. 떨어지는 내 말들을 보고 있노라면 ‘아, 내가 저런 말을 했었구나. 생각 없이 뱉었는데 그 애한테는 상처였겠구나.’, 나도 괴로워져요.

학교에서 의무교육으로 수화를 가르치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예요. 말수를 자정상태까지 줄이려고요. 수화는 재미있긴 한데 외울 게 너무 많아서 좀 어렵기도 했어요. 대입에서 국어, 수화, 영어, 수학 이 네 과목이 내신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수화과외가 제일 비싸죠, 과외 두 시간
하고 나면 에어로빅이라도 한 것처럼, 근육이 다 뻐근하니까요.

사람들이 말을 잘 하지 않기 때문에, 저는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모릅니다. 하지만 가까운 사람들의 마음은 그때보다 잘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말수를 되도록 줄여야하기 때문에 일단 가까워지면 안아주고, 손잡아주고 이런 비언어적 의사소통들이 말을 대신하거든요. 하지만, 외국으로 유학을 가거나 지방에서 올라왔거나 해서 비언어적 의사소통을 할 정도로 가까운 사람이 없는 사람들은 많이 외로울 거예요. 신문을 보니 하도 말을 안 하고 사는
사람이 많아서 산 입에 거미줄치고 사는 기생거미가 유행이래요. 외롭겠죠? ‘벙어리 냉가슴 앓듯’이 참고 있는 말들이요. 글자비는 내부를 공고하게 하지만, 외부와는 단절하게 만들어요. 전 그게 참을 수가 없어요. 어떤 노인분들은 글자비를 두려워하는 세상을 좋아하기도 해요. 그 땐 세상이 너무 시끄럽고 혼란스러웠대요. 지금은 조용하니 참 좋다고 그러시더라고요.

공자님이 논어에서 ‘신독’이라고 말씀하셨어요. 혼자 있을 때에도 도리에 어긋나지 않게 몸가짐, 마음가짐을 단정하게 해야 된다고요. 겉으로 보면 다들 점잖고 단정하죠. 마음가짐이 단정한지 어쩐지는 알 수가 없어요. 제 생각엔 단정하지 않을 것 같아요. 정말 거리낄게 없다면 왜 글자비 따위를 두려워하겠어요? 저기 아프리카 어느 밀림 속 씨족마을에서는 서로 다 가족이라 숨길게 없기 때문에 마음껏 소리치고 노래도 부른대요. 다큐멘터리에서 봤어요.

노래라니! 도대체 노래는 어떤 걸까요? 저는 책에서 밖에 그것을 본 적이 없어요. 무척 아름답다고 하던데 꼭 들어보고 싶어요. 말을 경제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많은 유희들이 사라졌어요. 지금은 기록으로만 전해지는 노래 가사들, 저는 글자들을 조용히 소리내어 읽어 봅니다. 내가 옳게 읽고 있는 것은 맞을까요? 원래는 ‘음’이라는 것이 붙는다던데. 노래가 사라지고 말이 짧아졌어요. 노래라니요, 우리는 서로 이름조차 부르지 않아요. 만약 글자비가 내린다면 비밀들이 누구를 향한 것들인지 공개될 거니까요. 야, 거기, 너, 어이, 에이, 요, 수많은 ‘야’ 속에 나라는 존재는 평범해져 버립니다. 좀 억울해요. 왜 비밀도 없는 내가, 뒤가 켕기는 몇몇 사람들 비밀을 지켜주느라 침묵해야 하죠? 먹물비 내리는 날이면 이런 억압들이 마음을 꼭꼭 채워요. 한층 센치해져요. 나는 말을 할 수 없으니까 글을 써요. 일기도 쓰고 편지도 쓰고 되는대로 써요. 내 글은 점점 더 길어지고, 종류도 다양해졌어요. 말로 할 수 없는 부분들을 채워내기 위해서요. 혹은 하고 싶은 이야기가 가슴속에 더 많이 남아서일지도 모르겠네요.

슈퍼 앞 파라솔 의자에 앉아서 과자봉지를 벌려놓고 캔맥주를 따는데, 쏟아지는 빗소리와 함께 남자의 비명 같은 게 들렸어요. ‘먹물비가 새 바지에라도 튄 모양이지.’ 맥주를 한 모금 쭉 들이켜요. “어!” 어? 다시 들려요. 큰일이 났나? 달려가 보니 웬 사람들 여남은 명이 둥그렇게 모여서 ‘말’을 하고 있어요. 세상에, 말을요! 그것도 매우 빠르고 쉴 새 없이 내뱉어요. 한 사람은 입으로 붐붐치치 붐붐치치 차 시동 거는 소리를 내고 있고요. 이 놈들은 뭐야, 이제 막 먹물비가 내리는데, 또 구름을 이렇게 오염시키기 시작하면 어떻게 합니까. 난 노래도 참고 있는데. 경찰에 신고해버릴까. 일단은, 저는 가만히 두고 보기로 해요. 원의 맞은편의 선 눈썹을 아래에서 위로 관통해 C모양의 피어싱을 한 남자가 팔짱 끼고 구경하고 있는 저를 보더니 윙크를 했어요.

에이요 오늘 드디어 비가 와
비와 더불어 내 맘에 말도 쏟아져 나와
오늘을 나 손꼽아 기다려 왔어
지긋지긋해 이 침묵 부숴버려 관둬

사람들은 감정을 참고 또 참어
그걸 생각하면 난 숨이 다 막혀
날 막을 사람 지금 내 앞에서 Hands up!
아무도 안 들어? 그럼 내게 질러 함성

와아- 하는 소리와 함께 다른 사람이 말을 가로채요. 아까 그 피어싱 남자예요. 붐붐치치 청년은 잠깐 새에 물을 마시고 다시 시동을 걸기 시작하네요. 

네게 질러줄 함성은 없어, No Doubt
Oh, Why? 간단한 이유를 몰라?
오늘은 내가 잘 보이고 싶은 사람 있어서
좀 빛나야겠으니 넌 내 등 뒤나 비춰줘

이 원 뒤에 우리를 쳐다보는 아가씨
귀에 걸린 귀걸이에 새겨진 A, B, 난 C, MC
우린 운명, 난 네 스타일이 마음에 들어
그러니 네가 누군지 내게 알려 주렴

에이, 비 하면서 제 양편을 손가락으로 짚고, “난 C” 하면서 자기 눈썹을 가리키는데, 사람들이 오- 하는 함성을 지르며 저를 떠밀었어요. 그 남자와 전 얼떨결에 그들이 만든 원 안에 서 있어요. 이 남잔 이죽이죽 웃고 있고, 차에 계속 시동 거는 붐붐청년만 빼고 모두 제 입을 쳐다보고 있어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건, 익숙하지 않아요. “음음, 저기요?”

오케이 오케이 그녀가 뭔가 말하려 해

“이렇게 말을 많이 하시는 건 예의가 어긋나는 거 아닌가요? 다들 알 만큼 아시는 분들이 공중도덕도 안 지키고. 경찰에 신고하겠어...”

“신고하겠어요” 라는 말을 끝내기도 전에 어디선가 호루라기 소리가 들립니다. 역시 준법의식 투철한 시민들, 누가 벌써 신고를 했군요. “도망쳐!” 사람들은 허둥지둥 흩어져요. 피어싱을 한 남자가 제 손을 잡고 이끌어요. “어서가요!” 저는 그 남자를 따라 달렸어요. 옷이며 얼굴은 온통 먹물비에 젖어 까매졌어요. 이십분쯤 달렸을까, 헉헉대며 달리다보니 비가 개었어요. 잠깐, 난 왜 달리고
있는 거지?

“나, 이제, 못 가겠어요, 근데, 왜 내가, 왜, 달려야, 하, 하는 거죠
?”

남자는 잡은 손을 놓고 주저앉더니 하하 웃다가 대답해요.

“내가 당신을 놓치기 싫었으니까.”

*     *     *

그 날 그들이 하고 있었던 건 “힙합”, 그 중에 “랩”이라고 하는 음악이래요. 음악이라고 하니, 말을 경제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사라진 많은 언어유희들 중 하나겠죠. 미국에서 차별받던 흑인문화에서 유래된 음악이라고 하는데, 난 그런 것이 있는 줄도 몰랐어요. 경찰이 쫓아오는 걸 보니 억압은 여전히 진행 중이군요. 머리에서 떠오르는 말들을 운율에 맞춰 내뱉는 건 ‘프리스타일’, 그들처럼 거리에서 원을 만들고 프리스타일을 하는 건 ‘사이퍼’ 라고 한대요.

“우린 평소에는 내 작업실에서, 비 오는
날에는 거리에 나가 사이퍼를 해. 빗소리에 우리 랩하는 소리가 묻히거든. 경찰한테 걸릴까봐 똥줄 타는 것도 스릴 있고.”

 ... ”

“그리고 이 봐, 당신이 랩하는 나를 파렴치한으로 모는데, 난 사라져가는 문화유산을 지키고 있는 거라고! 이렇게 예쁜 아가씨한테 나쁜 놈으로 몰릴 수는 없지, 안 되겠다. 내가 보여줄게.”

“그냥 불법행위면, 당신 경찰에 신고할 거예요? 그리고, 왜 자꾸 반말이에요
?”

“내가 당신보다 나이가 많을 테니까
."

서른넷
, 본명은 이민철. 그는 자신이 MC라고 소개했어요. 자기 이름 약자. 그리고 Microphone Checker의 약자로 랩하는 사람을 뜻하는 말이라나요.

그는 나에게 자신이 문화유산을 어떻게 지켜나가고 있는지 보여주겠다고 했어요. 범법자 주제에 이런 밑도 끝도 없는 긍지라니, 나, 불타는 시민정신으로 그의 작업실을 따라갔어요. 만약 구름을 심하게 오염시키는 거라면, 경찰에 넘기게요.

“이 프로그램으로 노래를 만들지.”

“피아노네요? 이걸로 뭘 하려고요
?”

“피아노는 사실 노래를 만드는 기본적인 악기였어. 30년 전에 노래가 금지되면서 모든 악기들이 클래식이나 국악 같은 가사가 없는 곡만 연주할 수 있고, 정부의 허가 하에 악기를 소지할 수 있도록 법이 바뀐 거지. 노래를 억압하기 위해서. 그리고 이 건반엔 피아노 소리만 있는 게 아니야. 여기 이 창에서 악기를 선택하면 기타, 베이스, 드럼 온갖 악기를 선택할 수 있어. 들어볼래?”

그는 여러 차례 악기 설정 란에 들어가 악기의 이름을 바꾸고 가상 건반을 눌렀어요. 그때마다 컴퓨터는 자동판매기처럼 그대로 다른 악기 소리들을 냈어요.
“이런 프로그램을 어디서 구했죠? 직접 만든 건가요?”

“우리 아버지는 우리나라 첫 ‘성대범죄자’였어. 노래금지령 전까지는 밴드의 보컬이면서 연주자였고. 기타, 색소폰, 베이스, 드럼 모든 악기를 연주했지. 내가 어릴 때 아빠는 나랑 기타를 무릎에 같이 앉히고 노래 연습을 하셨지. 아버지는 노래를 사랑하셨어. 정부에서 먹물비를 줄이기 위해 노래금지령을 내린 후에도 아버지는 거리에서 공연을 했어.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는 불법집회를 열었다는 죄로 연행되고, 집에 경찰들이 찾아와서 아버지의 기타들을 부쉈어. 악기가 부서지고 연주를 할 수 없어진 아버지는 악기 대신 비트박스를 배우셨어. 다시 거리로 나가서 비트박스를, 그리고 랩을 하시다가 붙들려 가셨지. 경찰의 심문에도 꽤 저항하셨던 모양이야. 아버지는 석 달 후에 풀려났지만 그 이후로 한 번도 말을 할 수 없으셨어. 그들이 동물병원에 데려가서 성대제거수술을 시켰거든. 말을 할 수 없게 말이야. 아버지는 시름시름 앓으며, 다 몰수당하고 몇 장 안 남아있던 자기 앨범들에 있는 노래들을 샘플링 해 이 프로그램을 만들었어. 이제는 세상에서 사라진 악기음들이 여기에 저장 되어 있어. 우리 아버지가 연주했던 악기들이. 이건 아버지의 유품이야. 난 이 음악을 널리 퍼뜨릴거야.”

그는 나를 보더니 싱긋 웃으며 말했어요.

“네가 악기를 골라볼래? 내가 그 악기들을 가지고 너를 위한 노래를 만들어줄게.”

나는 베이스, 드럼, 기타를 골랐어요. 특히 베이스는 가요가 사라지면서 함께 사라진 악기여서 처음 듣는 음색이었어요. 그 먹먹한 저음이 좋았어요.

“넌 힙합을 좀 안다, 힙합은 베이스가 생명이지. 네가 더 맘에 들어지는데.”

그는 장난스럽게 내 왼 귓불
의 귀걸이를 건드리더니, 세 악기로 금세 곡을 만들어냈어요.

“아버지 앨범에서 악기소리를 따는 것을 ‘샘플링’, 그걸 배열해서 작곡을 하는 것을 ‘시퀀싱’이라고 하지. 이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곡이야. 너만을 위한 곡. 다음번에 또 와. 그 땐 이 곡에 가사를 써서 널 위한 노래를 만들어 들려줄거야”

*     *     *

안 갈 수 없었어요. ‘나’를 위한 ‘노래’잖아요. 연인을 위한 ‘노래’를 불러줄 수 있는 사람은 장담하는데 이 세상에 몇 없어요. 다들 노래가 뭔지도 모르는 걸요. 게다가, 나를 위한 노래는 썩 괜찮았어요.

MC의 작업실은 온통 새까맸어요. 그는 그의 방을 검은 방음스펀지로 천장까지 틈새 없이 도배를 해놓았어요. 말을 많이 하는 것을 이웃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요. 먹물비 온 날 창문을 활짝 열어두었던 것 같이, 혹은 천장에서 비가 크게 샜던 것 같이 까맣죠. 삭막했어요. 유일하게 빛이 들어오는 작은 환기구 틈새의 태양조각만이 시간을 가늠할 수 있는 전부였어요. 그 새까만 방에서 몸을 섞고 있으면, 꼭 우리가 폐허가 된 세상의 마지막 생존자들처럼 느껴졌어요. 우리는 마치 인류라는 종 전체의 번식이 우리에게 달려 있다는 듯이, 치열하고 당연하게 몸을 섞어요. MC는 내 귀에 달린 A와 B를 차례대로, 그리고 저는 그의 C. 우린 서로의 글자를 깨물고 핥아요. 키스마저도 이마, 피어싱, 볼, 그리고 입 순서로 한다니까요. 따뜻한 이마, 차가운 눈썹, 더 따뜻한 볼, 뜨거운 입술. 아, 좋다. 내 혀가 이렇게 온도를 잘 느낄 줄은 그를 만나기 전엔 몰랐어요. 그의 앞에서는 무엇도 참지 않아도 돼서 좋아요. 내 몸의 욕망도, 내 머리의 욕망도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어요. 그는 내 이름을 소리내어 불러주는 유일한 사람이에요. “야, 너, 거기”가 아니라 “성은이”라고 부르며 나를 특별한 존재로 만들어줘요. 그의 앞에서는 하고 싶은 말도 다 할 수 있어서 좋아요. 먹물비가 내리건 말건 그는 항상 내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해요. 나는 그가 좋아요. 그가 내 모든 것을 알고 싶어 하듯 나도 그의 모든 것을 알고 싶어요. 그를 따라 힙합을 알아가고 있어요. MC는 나에게 가본 적 없는 세계들을 꿈꾸게 해줘요. 자기가 꾸는 꿈을 함께 꿀 수 있게 해 줘요.


“기록에 의하면, 힙합은 DJ Koolherc이 뉴욕의 브롱스라는 동네에서 시작한 동네 파티가 시작이야. 난 브롱스에 갈 거야. 너도 같이 브롱스에 가자.”

"MC."

“응?”

“나도, 널 위해 노래를 만들었어. 들려주고 싶어.”

“불러봐.”

“비트박스 해줘.”

붐 치 붐붐붐 치 삐끼삐끼삐끼 붐치치

그대가 서 있는 풍경은 항상 봄날
덕분에 만개한 내 맘의 꽃밭
가끔씩 나도 모르던 날 발견해 놀라
내가 왜 이러는지 나도 몰라

그동안 잊혀져서 희미해졌던
메마른 감정에 붉은색이 입혀져
그대를 위해 읊을 사랑시도 외고
한층 더 밝아지는 내 삶의 채도

당신의 존재는 끝없는 Inspiring
그대가 헝크는 손길에 익숙해진 머리
그대를 만나기 위해 난 지금까지 여기서
기다렸고 마침내 우린 나란히 섰지

평소에 열심히 일기며 편지를 써 둔 보람이 있었어요. 내 첫 가사는 그를 만나고 난 다음부터 쓴 기록들에서 좋은 문장들을 ‘샘플링’해서 라임을 붙여 ‘시퀀싱’한 것이었어요. 표정만 봐도 알아요. 그는 감동했어요. 그는 나를 안더니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어요.

“너랑 나랑, 팀을 만들자. 같이 거리공연도 하고, 매일 공연을 하며 조금씩 동쪽으로 움직이는 거야. 그러다보면 언젠가 브롱스에 닿게 될 거야
.”

그렇게 우리는 팀을 결성했어요. 이름은 ‘네오-로맨틱’. 학교에는 휴학계를 내고, 나는 내 자취방을 빼고 그의 작업실로 이사를 갔어요. 종종 달리기 연습을 했어요. 아마 도망연습이라고 하는 게 더 어울리겠네요. 그리고 밥을 먹고, 몸을 섞고, 악기들을 섞어 음악을 만들었어요. 일곱 곡을 만들었어요. 내일은 이 곡들로 첫 공연을 할 거예요. 누가 우리 음악을 들어줄지는 몰라요. 불법이니까 장소며 시간은 사이퍼 친구들에게 말고는 비밀인 게릴라 공연이거든요.

*     *     *

“준비됐지?”

나는 말없이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어요. 사실 너무 떨려요. 내가 잘 해낼 수 있을까요? 가끔 먹물비 주의보 기간에 짧은 말 몇 마디 한 것 말고는 한 번도 법을 어겨본 적이 없는데요. 그는 내 눈을 보더니 가져온 붐박스의 플레이버튼을 눌렀어요. 그의 아버지가 샘플링하고, 내가 악기를 고르고, 그가 시퀀싱한 곡이 흘러나오기 시작해요.

안녕 내 이름은 성은이
거꾸로 하면 이성은
오늘은 이성은 잃고서
불러봐 네 이름 일곱 번

난 싫어 날 억압하는 모든 권력
지금 날 구속하는 건 아무것도 없어
겁 없이 거리 위로 나선 이유는
찾고 싶었어 나만의 이름을

우린 언제나 걱정해 덜덜
먹물비 내릴까봐 참는 말과
어딘가로 사라져버린 노래
오늘은 다 같이 불러 보세

날 따라 해봐요 빠밤빰빰
내 이름은 성은이 나난난나
세상을 검게 만드는 건 비가 아니야
네 마음을 가로막은 걱정과 억압이야

반응은 다양했어요.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들도 있고 같이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좀 신기했던 것은요. 어른들이 아이들보다 더 좋아했다는 거예요. “어머, 몇 년 만에 들어보는 노래야?” 시장갔다 오던 아줌마들이 먼저 모여들었고요. 점심을 마치고 돌아가던 넥타이 중년들도 모여들어 갑자기 손을 들더니 리듬에 따라 까딱까딱 손을 흔들기 시작했어요. “Put your hands up! Pu'cha handz up!" MC는 더 신나서 반응을 유도했고요.

아이들은 대부분 ‘저게 뭐야?’라는 눈초리로 흘겨보고 지나갔어요. 그렇게 다섯 곡을 했을까, 내가 MC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경찰들이 호루라기를 불며 쫓아왔어요. 우린 평소에 연습하던 대로 달리고 또 달렸지요.

“아하하. 여러 사람 앞에서 노래를 불러 본 건 처음이야. 그리고 그렇게 큰 소리를 질러본 것도 처음이야. 후련하다. 내 목소리가 이렇게 클 수 있구나.


“헉, 헉, 아쉽다, 몇 곡 안 남았는데.”

“아니야, 오늘 잘했어. 다음번에 또 하면 되지.
사람들은 역시 노래를 그리워하고 있었던 거야.”

MC와 나의 첫 거리공연은 성공적이었어요.

매주 수요일 한 시, 필요한 건 다른 놈들보다 좀 토실토실한 건전지 여섯 개를 넣은 붐박스 하나. 장소는 매 번 바뀌어요. MC와 나는 노래를 불러요. 우리가 나타나고, 붐박스의 플레이버튼을 눌리면 삭막하던 거리가 축제의 공간으로 변해요. 나는 즐거워져요.

게릴라 공연은 도시의 이벤트가 되었어요. 이제는 ‘Bombing’이라고 불러요. 힙합의 한 요소인 그래피티하는 사람들이 몰래 나타나서 벽에 낙서를 하고 따온 데서 유래한 이름이에요. 사람들은 언제 어디서 우리가 나타날지 궁금해 해요. ‘언제’는 언제나 수요일 한 시 아니냐고요? 이제는 저도 몰라요. 숨어서 노래를 부르던 사람들이 거리에 나타나기 시작했거든요. 락, 펑크, 힙합, 레게. 숨어서 숨 쉬고 있는 음악이 이렇게 많을 줄 생각도 못했어요. 반가운 일 하나, 빗방울의 색이 점점 옅어지고 있어요. 도시엔 활기가 돌아요. 노래는 즐거운 거니까요. 우리가 거리에 나타나 노래를 부르면 경찰은 여전히 술래처럼 뒤쫓고, 결국은 달리고 달려야 하지만 노래는 계속 되어야만 해요. 우리는 어느 노래 가사처럼 ‘멈춤없이 거침없이’ 브롱스까지 달려갈 거예요. 사랑하니까요. 무엇을 사랑하냐고요? 음악을요, 힙합을요, 나를요, 그리고 당신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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