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필 휘 지

 

정상혁(국문·05)

 

 

 

화선지를 펼치면 여백이 눈부시다 부신 눈으로 먼 곳에 머물던 바람의 문양이 배경을 채색한다 먹구름은 서진書鎭처럼 누워 제 지문을 올려놓고는 한참을 머문다 흥취를 아는 새들이 단조처럼 느린 점점으로 와 박히는 사이 해는 벌판의 색을 바꾸어놓는다 먹 가는 소리처럼 아득한 수풀의 흔들림, 꿈꾸듯 지그시 눈감는 모든 잎사귀 사이로 풀벌레마냥 별들은 총총 제 몸의 불을 켠다 물고기처럼 수심을 헤아리며 시간은 기다리고… 단 한 순간에 시는 떠오를 것이다 삼라만상을 가늠하듯 숨 고르는 동안 마음은 벼루처럼 고요하다 갈래의 지류에서 삶이 본류로 모일 때, 결이 가라앉고 잠처럼 사방의 뒤척임이 사윌 때 사람의 마을을 향해 온 마음은 모일 터, 그때 바람의 기척은 멎는다 어둠의 손샅을 지나는 모든 별빛이 한 필 붓처럼 장단을 타면 이윽고 완성되는 망설임 없는 선線 하나

강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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