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그다드에서 이진숙입니다"

포탄이 날아드는 아찔한 전쟁 상황. 이를 시청자들에게 생생히 전했던 기자는 현장과 다소 어울리지 않는 조그마한 체구의 여자였다. 모래 폭풍을 헤치고 카메라 앞에서 “바그다드에서 이진숙입니다.”를 외치던 주인공, 바로 이진숙 MBC 홍보국장이다. 날카로운 눈매에 특유의 무뚝뚝한 경상도 어투로 인해 평소 차가운 이미지로 각인됐던 터라 그를 기다리며 기자는 다소 긴장했다. 하지만 첫 만남에서 “연세춘추에서 오신 기자신가요? 반가워요.”라는 따뜻했던 한마디에 이내 긴장은 누그러졌다. 그는 인터뷰 내내 편안한 분위기를 조성하며 마치 친한 후배에게 조언을 하는 것처럼 담담히 자신의 이야기들을 풀어놓았다.

 

단순한 우연? 필연을 넘어선 운명!


이진숙 국장이 기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던 것은 우연으로부터 시작한다. 대학원 재학 시절 분식집에서 밥을 먹던 그는 TV에서 광고 하나를 보게 됐다. 그 광고는 다름 아닌 기자채용에 관한 것이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그는 지원서를 내게 된다. 당시 미국 방송 기사를 교재로 사용했던 것도 지원을 결심하는 데 한 몫을 했다. “(교재 속의)기자들이 간결, 명료하게 설명 할 뿐만 아니라 사회 지도층, 명사, 정부 고관들을 거침없이 지적하는 모습이 상당히 인상적이었어. 뿐만 아니라 그 속에서 뉴스를 뽑아낸다는 것이 멋있게 느껴졌지.”

수차례의 고배를 들어야만 합격할 수 있다는 이른바 ‘언론고시’를 그는 단 한 번에 패스하며 MBC에 입사했다. “남들은 한 번에 합격했다고 놀라는데 결코 놀랄 일이 아니야. 당시 시험과목은 영어, 국어, 상식이었어. 일단 영어는 통역대학원까지 갔으니 남들보다 유리할 것이고, 국어는 학창시절 내내 좋아했던 과목이어서 글쓰기에도 자신있었지. 대학원 준비할 때 뉴스로 공부했으니 시사상식에도 해박했던 거야.” 이렇듯 그는 그야말로 ‘기자가 되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췄던 셈이다.

이 국장은 기자의 일을 ‘역사라는 원자재를 캐내는 것’에 비유했다. 그는 “역사를 캐내는 기쁨은 해보지 않은 사람은 몰라”라는 말과 함께 자신이 기자로써 느꼈던 바를 털어놓았다. “역사가 생겨나는 현장을 최전선에서 목격하고 나를 통해 그 현장이 시청자들에게 전달된다는 데에서 기쁨을 느꼈어. 또한 사회의 비리, 잘못된 것을 드러내 이것이 시정된다는 점에서 희열을 느끼곤 했지.”

언제 기자하길 잘했다고 느꼈냐고 묻자 그는 즉시 “매 순간.”이라고 짧게 답했다. “나는 정의, 명분, 대의 이런거에 따라 인생을 살았어. 언론을 입법부·사법부·행정부에 이어 제4부라고 하듯 기자라는 직업은 바로 내 인생관과 상당히 맞아 떨어지지 않았나 생각해”라며 말을 이어나갔다. 이 국장에게 기자란 우연 아닌 필연이 아니었을까. 아니, 그보다 운명일지도 모른다.

 

이진숙, 끊임없는 노력가


이 국장의 프로필을 들여다보면 유독 어딘가로 배우러 다닌 이력이 많다. 지난 1993년에는 하버드대로 연수를 다녀왔고, 이듬해에는 바그다드 무스탄스리아대로 향했다. 2000년에는 존스홉킨스대 국제학대학원에 연수를 다녀왔다. 기회가 날 때마다 배우기 위해 떠났던 그는 ‘기회란 준비된 자에게만 오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내가 준비가 돼 있지 않은 상태에서 중요한 임무를 달라고 하는 것은 과욕이라는 것이다.

그의 인생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다주었던 종군 기자의 기회가 왔던 것도 그가 준비돼 있었기 때문이다. 80년대 후반 중동은 이른바‘나쁜 뉴스’에 빈번히 등장했고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alestine Liberation Organization, PLO) 역시 테러단체로 자주 회자되곤 했다. 턱수염이 덥수룩해 생김새도 독특한 중동인들에게 이 국장은 자연스레 호기심을 가졌다. 이후 그는 중동관련 세미나에 참석하고 이라크 대사관 사람들과도 교류하게 된다. 이것이 여자이고 사회부 출신인 기자를 파격적으로 중동에 파견한 이유였다. “그때 내가 중동에 관심이 없었거나 대사관에 아는 사람이 없었다면 중동에 갈 수 있었을까? 이라크 대사관은 누구보다도 중동을 이해하고 있던 나를 ‘객관적으로 기사를 쓸 수 있는 기자’라고 판단해서 비자를 발급해줬겠지. 그러니까, 내가 갈 수밖에 없던 상황이었던 거야.” 이렇게 그는 끊임없는 공부를 통해 자신만이 가진 경쟁력을 보여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그는 영어교육을 전공으로 하고 통번역대학원까지 나왔지만 한 순간도 영어공부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기자는 단순히 일상적인 회화만 잘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전문 지식이 포함된 질문을 하고 이해해야 하는 직업이기 때문이다. 그는 워싱턴 특파원으로 파견됐을 때에도 현지 기자들에 뒤지지 않기 위해 쉬지 않고 노력 했다. 그는 길었던 설명을 잠시 멈추고 생각에 잠기더니 말했다. “인생이 끊임없는 공부의 연속인 것 같아.” 그의 치열했던 지난날이 고스란히 드러난 한마디였다.


두려움을 넘어선 떳떳함


그는 두 차례에 걸쳐 전쟁터로 파견됐다. 이것은 그에게 단순히 역사를 발굴한다는 흥분만을 가져다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니, 나도 사람이니까 당연히 두렵기도 했지.” 하지만 그에게는 두려움보다 기자로서 현장에 대한 열망이 더 컸다. 더이상은 위험하다는 회사의 철수 명령으로 현장을 떠나야만 했을 때 그는 애걸복걸 매달렸다. 하지만 회사에서 ‘네가 앞으로 보내온 기사는 쓰지 않겠다’라며 강경한 태도로 일관하자 도리가 없었다. 단 1천 km 떨어진 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 못한다는 괴로움은 상당했다. 호텔방에 앉아서 외국 기자들이 보내주는 기사를 요약해 기사를 작성하려니 수치스러운 마음에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하는 생각도 했다. 3일 후, 아쉬움에 철수하며 신청해놓은 취재비자가 나오자 바로 그날 밤 국경을 넘었다. “국경에 다가오자 쿵쿵 하는 폭격소리를 들으며 ‘아, 진짜다. 장난이 아니구나’라고 느꼈지. 더구나 한 아이의 엄마로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남다른 심경을 가질 수밖에 없었어. 그래도 호텔방에서 남의 뉴스를 베끼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을 해서 넘어가게 된거야.” 떳떳함이 되레 위험한 선택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무엇보다 자신에게, 딸에게도 부끄럽지 않기 위해 전쟁터로 뛰어 들었다.

떳떳함의 보상일까. 그는 종군 기자를 마치고 돌아와 1994년과 2003년에 각각 ‘최은희 여기자상’과 ‘한국방송대상 보도기자상’ 등 각종 언론 관련 상을 수상했다. 그런데 상을 받았을 때 ‘생각보다 무덤덤하더라’는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상이라는 것은 보도가 나간 한참 뒤에 주어져 실감이 덜하기 때문이다. “사실 기자로서 보람되는 순간은 따로 있지. 그건 보도가 나가고 시청자가 반응을 보일 때가 아닐까 싶어. 그 순간이 진짜 상이겠지.”

 


거듭되는 도전, 그리고 꿈

 

이 국장의 인생은 교사에서 다시 학생으로, 그리고 기자까지, 도전의 연속이었다. 기자 생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사회국 기자로 첫 단추를 끼우고 두 번 종군 기자로 임명됐다. 그리고 지난 2006년에는 워싱턴 특파원으로 세계의 중심에 발을 디디게 된다. “워싱턴 특파원이 된다는 것은 기자로서의 특권이 아닐까 싶어. 그런 자리를 맡게 된 것은 영광이었고 잘해보고 싶었지.” 미국을 모르고 중동을 이해할 수 없고, 중동 모르고 미국을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워낙 중동을 많이 겪었던 그였으니 워싱턴 특파원 시절 그는 그야말로 ‘물 만난 물고기’던 것이다.

워싱턴 특파원을 역임한 후 그는 정책협력부장을 거쳐 지난 7월 MBC 홍보국장 겸 대변인으로 임명됐다. 회사의 중역의 자리에 오른다는 것은 또 다른 도전이었을 터. “정책협력부장이 되면서 기자라는 자리를 처음 떠나게 됐어. 그 전에는 기사쓰고 취재만 했는데 이 때 회사의 재무구조, 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상 등 회사 전체의 그림이 보였지. 굉장히 새로웠고 만나는 사람도 많아 배울 점도 많았어.”

홍보국장으로 임명되고 한 달 뒤, 『PD수첩』의「4대강 6m의 비밀」편이 방송 보류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 국장은 대변인으로 사측의 입장을 대변했다. 그러자 한편에서는 그의 행동에 실망감을 내비쳤고 어떤 이들은 그를 비판하기에 이르렀다. 만약 그가 기자의 자리에 있었어도 같은 결정을 내렸겠냐고 질문하자 그의 답변은 ‘그렇다’였다. “기자라면 무엇보다도 팩트에 근거하는 기사를 써야 하지. 아무리 기사의 의도와 취지가 좋더라도 팩트 하나라도 틀리게 된다면 잘못된 기사야. 누군가 내게 ‘언론사에 충성한다’라고 했지만 그렇지 않아. 단지 팩트에 충성할 뿐이지.”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내 생각과 입에서 나오는 말이 다르면 그건 얼마나 불행한 일이야. 내 인생관 하고도 맞지 않는 일이고, 얼마나 괴롭겠어. 그건 이중인간이지.”라고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인생이 끝없는 모험이자 도전이었던 그는 요즘 젊은이들의 꿈과 현실에 대해 조언했다. “꿈과 현실이 일치한다면 더할 나위 없지만 그렇지 않다면 이원화된 인생을 살아보면 어떨까? 현실과 어느 정도 타협하면서 꿈을 추진하는 것이지. 어느 접점에서 만나면 좋은 것이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괜찮아. 항상 현실에만 안주하는 사람보다는 계속해서 꿈을 꾸는 이가 더 나은 법이거든.”

수많은 도전과 이뤄낸 이 국장의 다음 목적지는 어디일지 궁금했다. 하지만 그 답을 들을 수는 없었다. 인생이라는 것은 끊임없이 펼쳐지는 것이고 본인만이 가지고 있는 꿈을 일일이 알려줄 필요는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를 주목해보면 머지않아 비밀로 남겨두었던 그의 꿈을 알게 될 날 오지 않을까. 그의 다음 여정을 응원해본다.

이진숙 홍보국장

1961년 경북 성주 출신으로 1983년 경북대 영어교육과를 졸업 후 대구에서 교사로 재직했다. 1년 반 만에 돌연 교사를 그만두고 한국외대 동시통역대학원에 진학했고 1986년 MBC 기자로 입사한다. 1990년 걸프전 취재와 2003년 이라크전 취재를 맡아 ‘종군기자’의 이미지를 각인시켰다. 2006년에는 워싱턴 특파원으로 파견된다. 지난 7월에 MBC 홍보국장 겸 대변인으로 임명됐다. 주요 수상은 제11회 최은희 여기자상과 제30회 한국방송대상 보도기자상이 있다.

박혜원 기자 lynsey@yonsei.ac.kr
사진 박동규 기자 ddonggu777@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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