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수 『단종애사』를 따라 가본 영월 기행

 

 

 

 

 

여정의 순서를 따라 청령포, 관풍헌 그리고 장릉

 

 

한양에서 단종이 유배된 영월까지의 거리, 500리. 한때 모든 사람을 거느리는 왕의 자리에 있었던 단종은 폐위되고 상왕의 자리에서 노산군으로 강봉돼 머나먼 영월로 유배됐다.

노산군이 다 낡은 남여를 타시고 종로를 지나 동대문으로 나가실 때에 장안 백성들은 길가 땅바닥에 엎드리어 울고 배웅을 내었다. “우리 상감마마 어디를 가시오?”하고 소리를 내어 외치다가 관노들의 손에 입을 얻어맞는 순박한 늙은이도 있었다…….
이윽히 앞으로 지나가신 행차를 바라보고 한탄하고 있는 즈음에 어떤 행인 이삼 인이 지나가며 하는 말이 들린다. “온종일 수라를 안 올렸대.” “온종일이 무엇인가. 영월부에 가시기까지는 일절 잡수실 것을 올리지 말라고 전교가 내렸다네.” 이러한 말이다. 설마 영월부까지 가시도록 잡수실 것을 드리지 말라는 전교야 내렸으랴 그것은 알 수 없는 말이다마는 이러한 소문이 어디서 난지 모르게 장안에도 퍼지고 행차가 지나가는 노변에도 퍼지었다.

춘원 이광수의 소설 『단종애사』에서는 당시 노산군의 유배모습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관노들에게 얻어맞는 늙은이를 보며, 또 수군거리는 행인들을 보면서 단종은 서러움을 품고 영월로 향했으리라. 과연 영월에 도착하자 쨍쨍했던 서울과는 달리 날씨가 우중충해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것만 같았다. 노산군이 그동안 품고 있던 서러움을 우리에게 토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영월에서 가장 먼저 향한 곳은 노산군의 첫 유배지, 청령포였다.

외부와 단절된 육지의 섬, 청령포

산을 넘고 강을 건너 또 산을 넘고 강을 건너 비에 젖고 볕에 그을어 칠월 초생달 빛에 두견성이 슬피 들릴 때에 하늘에 사무치는 한을 품으신 노산군은 마침내 영월부 청령포(淸嶺浦) 적소에 도착하시었다…….
만일 노산군에게 충성된 빛을 보이었다가 그 말이 왕의 귀에 들어갈까 두려워함이다…….
“소인 올라가오”하고 하직을 아뢴다. 마땅히 소신이라고 일컬어야 옳을 처지에 소인이라고 일컫기가 왕방연의 마음에 심히 괴로웠다. 그렇지마는 지금은 노산군은 대군도 못 되시고 군이시니 소인이라고 일컫는 것도 과한 대접이 될는지 알지 못한다. 그렇지마는 관인들은 다 노산군께 칭소인하고 다만 궁녀들과 내시들만이 옛날 말대로 칭신을 하였으나 아무도 이것까지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다.
“오 가느냐. 애썼다”하시는 노산군의 눈에는 눈물이 돌았다. 그러나 곧 위의를 정제하시고, “애썼다. 상감 뵈옵거든 내 잘 왔다 아뢰고, 거처가 좀 협착하나 수석이 좋으니 다행일러라고 아뢰어라”하시고 망연히 무엇을 잃으신 듯하시다.

영월읍내에서 조금 떨어져 외딴 느낌을 주는 청령포는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있고, 서쪽에는 보기만 해도 아찔한 육육봉이 솟아있어 육로로는 갈 수 없고, 오직 강가에서 나룻배를 타고서만 들어갈 수 있다. 밖에서 본 청령포는 천천히 돌아 나가는 강과 험준한 산으로 둘러싸인 조그마한 땅덩어리에 불과했다. 청령포를 건너기 위해 나룻배를 타자 노산군의 한이 느껴지는 소나기가 쏟아졌다. 청령포를 건너자 잠깐 퍼붓던 비가 서러움을 다 쏟아냈는지 금세 거짓말처럼 그쳤다.

노산군이 살았던 경복궁의 십분지 일도 안 되는 크기에 자그마한 기와집 한 채가 노산군의 눈물을 머금은 소나무 숲에 가려져 있었다. 그래도 당시에는 가옥이 몇 채가 있었을 테지만, 지금은 노산군이 머물렀던 기와집 한 채만이 쓸쓸히 남아있다. 게다가 주위를 에워싼 소나무 숲은 바깥세상과 단절된 느낌마저 주고 있었다. 소나무 중에는 단종이 유배갈 때 걸터앉아 쉬었다고 전해지는 관음송(觀音松)이 있는데, 이는 단종의 유배 당시를 보았으며(觀), 때로는 오열하는 소리를 들었다(音)는 뜻에서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노산군은 여기서 아랫것들에게는 말하지 못하는 설움을 풀었을지 모른다.

청령포 뒷산에는 노산군이 자주 올라 한양을 바라봤다는 망향탑(望鄕塔)이 있었다. 한양에 두고 온 왕비 송씨를 생각하며 흩어져 있던 돌을 주워 쌓아 올렸다는 탑으로 단종 노산군이 남긴 유일한 삶의 흔적이다. 왕위를 찬탈당한 허탈함과, 부인을 그리는 마음이 이 까마득한 절벽 위의 돌탑에서 느껴졌다.

 

한양에 두고 온 왕비 송씨를 생각하며 단종이 흩어져 있던 돌을 주워 쌓아 올렸다는 망향탑

 

황량하다 못해 황폐한 관풍헌

어디서 우루루하는 소리가 난다……. 위험은 가까웠다. 노산군이 앉으신 방에도 뒷문으로 물이 들어오기를 시작하였다……. 마침내 노산군은 궁녀들을 데리시고 집을 떠나시었다…….
“천우다. 나는 죽어도 아깝지 아니한 몸이다마는 너희야 죽어서 되겠느냐. 자, 건너가거라. 여기만 건너가면 읍내가 얼마 멀지 아니할 것이요, 또 읍내 가기 전에 민가가 있을 터이니 사람 사는 곳에 인정 없겠느냐. 어서 건너가거라.”
하시고 노산군은 아니 건너가실 듯한 빛을 보이시었다. 노산군은 이제 이 모양을 하고 살아나실 뜻이 없으시어 무고한 궁녀들―당신을 따라 불원천리하고 아무 영광도 없는 곳에 따라온 그들이나 살길을 얻어주시고는 차라리 이 밤에 몸을 던지어 이 세상을 버리자고 작정하시었던 것이다.

단종이 유배되던 해 가을, 청령포에는 큰 홍수가 들이닥치어 노산군은 강에 몸을 던지려 했지만, 궁녀들이 목숨을 걸고 노산군을 영월읍내로 모시었다. 당시 영월부사는 더 이상 노산군을 유배지인 청령포가 아니라 객사였던 관풍헌에 모시게 했다. 기자가 청령포에서 나와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이 관풍헌이었다.

관풍헌은 굉장히 고요했다. 청령포와 달리 이곳은 찾아오는 관광객도 없어 황량함을 넘어 황폐함까지 느끼게 했다. 관풍헌에 올 때부터 노산군의 마음 속에는 이미 이승에서의 삶에 대한 생각이 사라졌을 것이다. 관풍헌 구석에는 자규루라는 조그마한 누각이 하나 있는데, 이곳에서 단종이 읊었던 시 ‘자규시(子規詩)’를 통해 단종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한마리 원한 맺힌 새가 궁중을 나온뒤로 외로운 몸 짝없는 그림자 푸른 산속을 해맨다
밤이가도 밤이와도 잠을 못 이루고 해가가고 해가와도 한은 끝이 없구나 (중략)
하늘은 귀머거리인가 슬픈 하소연 어이 못듣고 어찌 수심 많은이 사람의 귀만 홀로 듣는가

부식된 망부석만이 남아있는 장릉

금부도사 왕방연이 울고만 엎드리어 언제 일이 끝날지 모를 때에 평소 노산군을 따라와 모시던 공생(貢生) 한 놈이 활시위를 뒤에 감추어 들고 노산군의 등뒤로 달려와서 노산군의 목을 졸라매고 북창 밖으로 잡아당기었다. 노산군은 뒤로 넘어지시어 줄을 따라 끌려가시다가 북창 문턱에 걸리시어 절명하시었다……. 시녀들이 알고 달려들어 목맨 줄을 끄르고 애써 소생하시게 하려 하였으나 다시 소생하시지 아니하시었다.

소설 속에서는 이처럼 극단적으로 묘사돼 있지만, 정사에 따르면 그해 10월 24일 노산군은 관풍헌에서 사약을 들며 그 한 많던 이승에서의 삶을 마치게 된다. 영월로 유배된 지 넉 달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당시 조선의 왕은 한양 100리 안에 묻히게 되어 있으나, 노산군은 500리 밖 영월에 묻히었다. 그마저도 강물에 떠내려간 시체를 충신 엄흥도가 건져내 몰래 묻은 것이었다. 죽을 때까지도 편히 눈감지 못한 노산군이었다.

영월읍내에서 차로 5분 정도 가면 노산군이 묻힌 장릉이 있다. 장릉이 있는 곳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산 밑은 박물관과 호수 등 구색을 갖추고 있지만, 정작 장릉이 있는 산 속은 적막하게 산새가 지저귀는 소리만 들렸다. 조선시대에도 버려졌던 단종은 지금에 와서도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장릉 앞에 있는 망부석들이 단종을 뫼시고 있었지만, 망부석들 역시 부식된 채로 소외돼 있었다.

장릉을 끝으로 단종 노산군의 한이 깃든 곳을 되새기며 서울로 올라왔다. 차로 3시간, 지금은 고속도로가 뚫려 있어 금방 갈 수 있지만, 단종의 흔적이 깃든 곳을 보고자 영월을 찾는 이는 아직 많지 않다. 가끔 오는 관광버스들이 그나마 단종을 찾고 있지만, 사람들은 사진을 찍기 바쁘고 단종의 한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오늘도 영월에서는 죽을 때까지 편히 눈을 감을 수 없었던 노산군이 서럽게 울고 있다.

 

임우석 기자
highbiz@yonsei.ac.kr
사진 김민경 이다은 기자
winner@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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