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하 작가의 『검은꽃』


1905년, 인천 제물포항에서 1천33명의 조선인들은 멕시코 행 화물선 ‘일 포드 호’에 올랐다. 무당, 고아, 농민, 양반, 그리고 황족까지. 남녀노소 상하귀천을 구분하지 않고 화물칸에 탄 사람들은 멕시코까지의 2달이라는 긴 여정동안 지옥을 경험했다. 그러나 그 배가 멕시코에 정박한 후 펼쳐질 것으로 기대했던 희망찬 미래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닿기만 해도 손에서 피가 흐르는 거친 작물 에케넨, 그리고 농장주들의 채찍이었다. 불가능한 희망의 끈을 잡아보고자 했던 열한 명의 젊은이들은 1910년 대한제국이 역사 속에서 사라지자 과테말라에 ‘신한국’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저항하다 과테말라 정부에 의해 모두 사살됐다.

김영하 작가는 이 역사를 담은 작품 『검은꽃』으로 지난 2003년 동인문학상을 수상했다. 왜 이 소설에서 단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는 ‘검은꽃’이라는 단어가 소설의 제목이 된 것일까? 김 작가는 수상 직후 인터넷 서점 알라딘과의 인터뷰에서 “우연히 과테말라에서 정부를 세우고 저항한 11명의 데스페라도(무법자)들의 이야기를 접한 후부터, 검은 꽃의 이미지가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검은색은 모든 빛을 다 흡수해야만 나타날 수 있는 색인데, 현재 자연에는 이런 색소를 가진 꽃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꽃인 동시에 세상 모든 색을 섞어야만 나오는 색인 검정색의 꽃에서 ‘정체성의 상실’이라는 의미를 읽었다고 이야기했다. 가능하지 않기에 아름다운 꿈들, 그것이 바로 검은 꽃이라는 뜻이다.

이 소설은 동인문학상 심사위원회로부터 “가장 약한 나라의 가장 힘없는 사람들의 삶을 강렬하게 그린, 만나기 어려운 작품”이라며 “올 한해 한국문학이 배출한 최고의 수작이자 뇌쇄적인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심사위원회는 “살기 위해 이길 수 없는 운명에 맞서는 이들에게서 우러나는 고결함과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었던 패배로 인한 슬픔을 느끼게 해 준다”고 수상작 선정이유를 설명했다. 그리고 문학평론가 황종연씨는 이 작품을 “역사소설을 반성하는 역사소설”이라고 말했다. 우리 역사소설의 관행처럼 한 개인의 삶이 역사를 대변하는 형식이 아니라, 여러 직·간접적 관계자들이 등장해 그들 각자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김씨는 이와 관련해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여러 매체를 통해 얻은 파편적인 정보들을 퍼즐을 짜 맞추듯 자신만의 진실로 만들어간다”며 “그러한 현실적인 인식체계를 반영한 새로운 형태의 소설을 탄생시키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러한 의도를 통해 탄생한 역사소설 『검은꽃』은 멕시코의 에케넨 농장에서 핍박받고 착취당한 나라 잃은 국민의 설움을 그리지 않는다. 그 대신 인간 본연의 추함과 극한의 상황에서도 피어나는 사랑, 그리고 좌절된 희망을 담담한 필체로 이야기한다. 유난히 눈이 반짝이던 떠돌이 고아 청년과 대한제국 황제의 친족 여식간의 사랑. 돈을 벌어 다시 제물포로 돌아가고 말겠다는 에케넨 농장 노동자들의 희망. ‘조국이 무너진 상황에서 일본도, 멕시코도 아닌 무국적으로 죽기 위해서 우리는 나라를 만들어야만 한다’는 역설을 운명으로 맞은 11명의 데스페라도의 ‘신한국’… 이 모든 순수한 꿈들이 바로 ‘검은꽃’들이었다. 이 가을, 떨어지는 낙엽을 바라보며 100년 전 스러져간 이들의 어둡고 아픈 역사를 좇아보는 것은 어떨까.


김유진 기자 lcholic@yonsei.ac.kr
일러스트레이션 박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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