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를 죽일 권리가 있다?

“피 흘리는 화면을 언제나 제일 먼저 칼라로 내보냈던 채널 40의 전통을 확고히 하기 위해서 시청자 여러분들께 자살하는 모습을 눈앞에 펼쳐 보여드리겠습니다.”―1974년 미국, 생방송으로 뉴스를 진행하던 한 아나운서가 수만 명의 시청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권총을 꺼내어 자기 머리를 쏘았다.
죽는 순간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것. 묘한 매력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매혹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이 거대한 결심을 실행에 옮기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들 죽는 것인가?’
프랑스의 저널리스트 마르탱 모네스티에의 『도대체 왜들 죽는가』는 한마디로 ‘자살’에 대한 백과사전이라고 할 수 있다. ‘왜들 죽는가?’의 문제를 구체적인 사례를 나열하고 있는 이 책은 ‘어떻게 죽을 것인가?’등 자살에 이르는 과정과 방법들까지 친절하게 소개해주고 있다. 자살에 대해 연구한 다른 책들처럼 심오한 분석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사람들은 오히려 ‘자살’이라는 현상 자체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에 더욱 흥미를 느낀다. 예를 들어 어떤 남자가 자기 머리에 못을 일곱 개나 박아 자살을 했다던가, 가이아나의 인민사원에서 천명 가까운 사람들이 집단으로 자살했다던가 하는 실제적인 이야기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읽는 이들을 자극시킨다. 그러나, 단순히 독자들의 흥미를 끌기 위해 이러한 사례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니다. 마르탱은 각각의 자살행위에 나타나는 그 사람의 기질, 자살하게 된 이유, 극단적인 상황 등에 대한 조명 없이 ‘자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사람들이 어떤 이유로 언제 어떤 상황에서 죽음을 선택하느냐 하는 문제는 어느 한가지 이유로만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절대 아니다. 사람들이 자살하는 동기나 방법은 너무나도 다양하다. 사랑 때문에 절망하여 죽기도 하고, 치욕이나 명예훼손 때문에 죽기도 하고, 또는 너무 행복해서 죽기도 하는 등 사람이 죽을 수 있는 이유는 무궁무진한 듯하다. 이처럼 수많은 종류의 자살 원인을 ‘정신질환’이라던가 ‘나약한 인간들의 반사회적 행위’로만 치부해버리는 것은 옳지 않다.
지난 1세기 동안 정신병과 자살이 동시에 증가했다는 사실에서 양자의 상호관계에 대한 가설이 있었다. 에밀 뒤르켐은 『자살론』에서 ‘사회적인 자살률은 정신병의 경향과 확정적인 관계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귀납적으로 보아 여러 형태의 신경쇠약증의 경향과도 확정적인 관계가 없다’는 것을 여러 통계자료를 이용해 증명해보이고 있다. 그 밖에도 그는 인종·유전적 요소 등 개인의 체질이나 낮의 길이, 계절에 따른 온도의 영향 등 물질적인 환경 역시 자살현상을 설명하기에 적합하지 않음을 밝혔다.
그렇다면, 뒤르켐이 제시한 자살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는 자살이 사회적 통합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현상으로 자살은 사회의 통합 정도에 반비례한다고 설명한다. 서로 다른 가치와 규범이 혼재할 때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 헷갈리고, 방황과 고민 끝에 죽어버리는 것이 가장 편하다는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뒤르켐이 말한 것처럼 자살은 그 기본적 요소에 있어서 사회적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남게 되는 가장 중요한 문제는 자살이 도덕에 의해서 허용되는 행동인가, 아니면 금지된 행동인가 하는 것이다. 우리에겐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있는 권리가 있는가. 사회가 강력하게 통합되어 있을 때 사회는 개인을 통제하에 두며 그들이 고의로 자신을 버리는 행동을 금지시킨다. 사회는 개인이 죽음을 통해서 자신의 의무를 회피하는 것을 막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인들은 자신이 자신의 운명의 주인임을 인정받는 한 스스로의 생명을 종식시킬 권리를 갖는다. 그들로서는 삶의 고통을 인내심있게 견뎌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에 대해 뒤르켐은 어느 정도의 자살 생성적 경향이 정상적인 사회학적 현상임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경향들은 각 사회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특정한 수준에서 제한되어야 할 필요가 있음을 덧붙인다.
스스로 죽는 것이 인간의 권리일지라도 그것은 분명히 신중히 행사해야 할 권리임에 분명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만큼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죽음을 향한 노력을 하는 만큼이라도 다시 한 번 삶을 향한 관심을 가져본다면 ‘자살’은 더 이상 동경의 대상도, 호기심의 대상도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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