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를 비판하는 문단의 목소리를 들어보다


조니 워커, 레이코 여사, 천박한 섬의 원숭이, 공기 번데기… 이 단어들이 어색하지 않다면 당신도 분명 ‘하루키 월드’에 속한 사람일 것이다. 하루키가 만들어 내는 소설 속 환상의 세계는 지난 1980년대 하루키 신드롬을 앓던 지금의 3-40대뿐만 아니라 젊은이들까지 매료시키고 있다. 이를 반증하듯 지난 2009년 출간된 하루키의 신간『1Q84』는 일본에서 1천만부, 우리나라에서는 300만부가 판매되며 하루키 최고의 베스트셀러였던『상실의 시대』를 넘어서는 판매고를 기록했다. 그러나 이토록 열광적인 독자들의 반응과는 다르게 문단의 시선은 싸늘하다. 문단의 대표적 하루키 비판론자로는 일본의 노벨상 수상자인 오에 겐자부로, 우리나라의 문학평론가 유종호 석좌교수(문과대·국문학)가 있다. 유 교수는 하루키 소설을 "감상적인 허무주의를 깔고 읽기 쉽게 씌어진 음담패설적인 소설”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하루키가 비판받는 가장 큰 요인 중 하나는 소설을 통해 전쟁에 대한 기억을 은폐하고자 한다는 점이다. 도쿄대학교 고모리 요이치 교수는 『무라카미 하루키론』에서 “『해변의 카프카』속에는 대일본제국의 식민전쟁에 대한 기억을 환기시키는 에피소드들이 수없이 깔려있다”며 “그의 소설은 사회적으로 널리 공유된 기억을 독자에게 일순간 상기시킨 후 그 모든 것이 어쩔 수 없었던 일이라고 설명해 그 기억 자체를 소거시킨다”고 말했다. 즉, 근친상간, 살인 등의 하루키 문학 속 장치들은 결말 부분에서 은폐되는데, 이를 통해 위안부 문제와 집단 학살을 비롯한 일본의 전쟁이 남긴 상처들을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요인은 그의 소설이 받은 미국문학의 영향이 너무 크다는 점이다. 수많은 미국 문학을 번역하면서 탄생한 하루키 소설 특유의 번역체는 일본인들에게마저 어색해 재미를 위한 ‘하루키 문체 변환기’가 생겨날 정도다. 일본의 문학평론가 다케우치 신씨는『1Q84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서 하루키 소설의 문체를 “외국문학 특유의 수사법을 일본어로 번역할 때 생기는 위화감을 하나의 양식미로 승화시킨 ‘암호화에 의한 스노비즘(속물 근성)’”이라고 비판했다. ‘왠지 모르겠지만 멋있는’ 스타일 덕분에 독자들은 내용의 이면에 무엇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겉에 드러나는 것이 전부라고 그는 주장했다.

마지막 요인은 삶에 대한 성찰 없이 형성된 소설 속 자아다. 정명교 교수(문과대·현대문학)는 “하루키 류의 대중지향적인 작품은 일본 고유의 미학을 추구하는 문학이나 현대의 부조리 등을 다루는 전위문학과는 품격이 다르다”고 말했다. 하루키 소설의 인간형이 삶에 대한 고민을 통해서가 아니라 생소한 음악과 브랜드, 유명 작가를 좋아하는 것으로 개성을 얻기 때문이다.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도 "유명한 작가들의 이름을 인용하는 것은 하루키가 그의 부족한 문학적 능력에 대한 알리바이를 대는 방식이다”라고 비판한 바 있다. 작품을 통해 자신의 문학적 재능을 입증하기보다 위대한 작가들을 인용함으로서 그들과 자신을 동일시한다는 것이다.

한편, 정 교수는 “본질이 아닌 모호한 스토리와 분위기, 사소한 사물들을 통해 인물형을 형성해내는 하루키의 스타일이 우리나라 문단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말했다. “소설 속 인물들처럼 개성 있게 살기 위해서는 깊은 고뇌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러한 성찰은 드러내지 않은 채 멋진 것만 보여주는 얄팍한 정신을 가진 문학적 경향을 현대 한국문학이 따라가고 있다”는 것이다. 덧붙여 그는 “정치, 경제적으로 강압적이었던 지난 1970-80년대를 거치며 사람들의 자존에 대한 욕망은 강해졌는데, 이를 이루기 위한 삶의 반성은 없었다”며 “때문에 환상적인 것들로 자존감을 충족시키려는 욕망이 생겨나 문학계가 이런 경향을 따라가게 됐다”고 말했다. 이런 문학은 자존에 대한 헛된 환상은 줄 수 있어도, 자기 품격을 만들어 주지는 못한다고 그는 설명했다.

하루키가 젊음에 바치는 낭만을 통해 얻어지는 위안은 누군가에겐 단지 문학적 가치로만 논의될 수 없는 것일지 모른다. 그렇기에 하루키를 읽는 것 자체를 막을 수는 없다고 유 교수와 정 교수는 입을 모았다. 다만 하루키‘만’을 읽는 것은 문제라고 말했다. 문학성의 포장을 입었으나 본질은 대중성이 전부인 하루키 류의 소설만을 읽는 것 보다, 여러 소설을 접했을 때 진정한 작품을 판별할 수 있는 눈이 길러진다는 것이다. 이처럼 문단은 하루키의 작품을 조금은 냉철하게 읽어보는 것은 어떨까라고 충고를 건네고 있다.


김유진 기자 lcholic@yonsei.ac.kr
그림 김진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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