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도 그런 얘기를 한 것 같다, 영화를 한 편 개봉하는 게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는 것 같다는. 일 년에 수십 편의 영화를 개봉하다 보면 정말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영화도 있고 어쩔 수 없이 개봉하는 영화도 있다. 좋아하는 영화를 만들어지기까지 기다리고 개봉을 준비하고 그리고 결국 개봉하는 과정은 흡사 누군가를 만나 연애하는 기분과 비슷하다. 개봉결과가 안 좋으면 아픈 이별을 한 것처럼 힘들고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고 좋은 결과가 나오면 개봉 후에도 관계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

- 영화사 스폰지 카페에 조성규 동문이 올린 글 중

『메종 드 히미코』,『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이제는 인디영화의 고전이 되어버린 여러 영화를 우리나라에 소개한 ‘영화사 스폰지’의 대표 우리대학교 조성규 동문(사학·88)을 만났다.

 

 

‘스피릿’을 가진 영화, 인디영화

“인디영화사죠, 인디영화사.” 영화사 스폰지에 대해 생소하게 느낄 독자들을 위해 스폰지의 소개를 청하자 돌아온 그의 대답이었다. “영화를 수입·제작도 하고, 극장도 하고…, 그냥 ‘영화사’라고 통칭하면 굉장히 광범위하잖아요, 작은 규모로 할 수 있는 건 다 하죠.”

그렇다면 조 동문이 말하는 ‘인디’는 무엇일까. “‘인디’라는 것은 정의하기 나름인 것 같아요. 하나 정확한 것은 ‘스피릿’, 정신의 문제라는 거죠. 백억을 가지고 만들어도 한 개인이 거대자본으로부터 독립해 자기의 의지로 만든 것이라면 나는 그것도 인디영화라고 봐요. 꽤 많은 영화사들이 영화를 하지만 상업영화를 지향하는데 반해, 우리는 꽤 오랫동안 인디영화 쪽을 계속 지향점으로 두고 바꾸지 않았다는 게 조금 다른 점이겠죠.”

영화에 발을 들이다

조 동문이 원래부터 영화 일을 생각했던 것은 아니다. 대학교에 입학하기 전에는 영화를 좋아하긴 했지만 마냥 방송국 교양 PD가 하고 싶었다. 그러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군대에 갔을 때 영화계에서 일하기로 마음을 먹고 그 때부터 어떻게 하면 영화계에 ‘몸담을 수 있을까’를 다방면으로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영화 잡지 기자를 해볼까’, ‘직접 연출부 등 영화 시장에 뛰어들어볼까….’

그런데 애초에 누군가의 밑에서 일을 하는 성격이 아니었던 그는 무엇이든 영화 일을 직접 해보기로 맘먹는다. 그러려면 어느 정도의 지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신문방송대학원에 진학했고, 대학원을 다니는 내내 영화 일을 하기 위한 준비를 했다. ‘조사방법론’ 수업이라면 영화관객과 관련해서 논문을 쓰고, ‘편성론’이라 하면 방송 3사의 편성을 분석하는 등 모든 공부를 모두 영화와 관련해 풀어낸 것이다. “이제까지의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때를 물어보면 94년에서 96년, 대학원 다닐 때였던 것 같아요. 영화 준비도 하고 대학원 생활도 재밌었고 주변 사람들과 친구들도 그렇고 모든 게 정말 즐거웠어요.”

즐거운 대학원 생활을 보내던 중 IMF가 터지고 계획하던 유학이 좌절되면서 그는 회사나 차리자고 생각을 바꿨다. 당시 조 동문이 영화와 관련해서 할 수 있는 일은 공짜 영화 잡지를 만드는 것뿐이었다. 잡지 창간이 그의 최종 목표는 아니었지만, 어떤 것이든 영화를 할 수 있는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지난 2000년 본격적으로 영화를 수입하고 2002년 영화사 스폰지를 설립하게 된 것은 절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우리사회를 보다 다양한 색깔로 채우려

조 동문은 다양성과 포용력이 부족한 한국사회의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문화적 다양성의 발현’을 추구하고 있다. 『아이언맨』과 같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 하나가 상영관의 70~80%나 점유하는 것이 건강한 사회의 단상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우리사회의 문화적 측면에서 ‘빈 곳을 채우는 역할’을 자처하고 나섰다. 이런 측면에서 그의 대표적인 경력은 『메종 드 히미코』나『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과 같은 일본영화들을 들여온 것이다.

조 동문은 지난 1989년 우리대학교 사학과 재학 당시 떠났던 여행으로 일본을 처음 접했는데, 그에게 그 일본여행은 젊은 체 게바라에게 라틴아메리카 여행이 가지는 의미에 버금가는 체험이었다. 첫 해외여행이었던 그 일본여행이, 그리고 일본이라는 나라 자체가 당시에는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그가 특히 일본에서 가장 부러웠던 것은 바로 ‘다른 것을 틀리다고 보지 않고 이해하는’ 일본의 다양성이었다. “세계의 어떤 음식도 일본 요리사의 솜씨로 먹으면 더 맛있다고 하잖아, 그만큼 그들은 언제든지 열려있고 변할 준비가 돼있다는 거지.”

그의 30대는 깐느와 함께 흘렀다

조 동문이 영화사 스폰지 카페(http://cafe.naver.com/ spongehouse)에 꾸준히 글을 올리는 것도 다양성을 추구하려는 맥락에서다. 그는 카페라는 대안적인 매체를 통해 앞으로 가지고 올 영화를 영화팬들에게 귀띔해주고, 미국 선댄스 영화제의 생생한 모습을 선보이는 등 영화팬들과 직접적인 교류를 하고 있다. 이렇게 카페에 쓴 글들은 영화팬들뿐만 아니라 그 자신에게도 큰 자산이 됐다. 그는 국민학생 때에는 일기에, 대학생 때에는 학교수첩에 빼곡히 당시 삶의 흔적을 남겨왔는데, 지난 2000년 이 카페를 개설하고 난 이후에는 까페가 모든 것을 대신하게 된 것이다. 십 년이 지나고 다시 본 글들은, 그때의 시간들을 새롭게 했다. 특히 깐느 영화제에 관한 부분이 컸다. 조 동문은 2000년 이후 스폰지 카페와 함께 한 자신의 십 년이 “깐느와 함께 흘렀다”고 표현했다. 영화하는 사람들에게 프랑스의 도시 ‘깐느’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데, 어느덧 그가 제작한 영화를 들고 매년 5월 깐느에 간지도 11년 째. 이제는 깐느를 가는 게 일상화가 됐다. 조 동문은 인터뷰를 하는 카페 안에서 우연히 만난 같은 영화 일을 하고 있는 오랜 친구와도 “깐느에서 보자”고 자연스레 얘기했다.

“배고파도 괜찮으면 해라”

그런데 이렇게 늘 꿈꿔오던 일을 하게 됐을 때 마냥 즐거울 수만 있을까 궁금해졌다. 아니나 다를까, 조 동문이 십여 년을 사람 채용할 때마다 늘 하는 말이 있다고 한다. “분명히 알고 시작해라. 첫째, 배고플 거다. 배고파도 괜찮으면 해라.” 인디영화 배급과 같은 마이너리티의 길을 걷는 그는 경제적으로 배고플 수는 있지만 절대 불행하지 않다. 오히려 그는 그가 높이 평가하는 가치를 철저히 추구하며 행복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그가 배우 전도연 씨에게 “내가 『멋진 하루』로 십억을 까먹었지만 당신과 친구가 되지 않았느냐, 누가 십억을 가지고 와서 당신과 친구를 하자고 하면 할 수 있겠느냐”라고 말한 것에서도 그의 이런 생각이 잘 드러난다. 그는 “마치 제로섬 게임과 같다”며 세상이 높게 평가하는 경제적 가치와 그 자신이 높게 평가하는 가치, 둘 중에 그는 자신이 옳다고 판단한 쪽을 선택한 것을 설명했다.

또한 그는 영화 일을 하면서 얻게 된 ‘존재감’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영향력’이라고 하면 좀 건방진 표현이고, 최소한 이 판에 있어서는 어딜 가든 내가 무시 받는 존재는 아니구나 하고 느낄 때가 있어요. 빔 벤더스·왕가위 감독을 개인적으로 연락하고 만나고, 김기덕·봉준호·홍상수 감독과 만날 때. 그때 느껴지는 존재감은 정말 기분 좋아요. 영화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엔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니들, 너무 열심히 살지 마라

조 동문이 가장 슬플 때는 좋은 영화를 다른 회사가 사들였을 때이지만, 요즘 그는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올해는 『어웨이 위고』, 『밀크』, 『시리어스 맨』,『하하하』 등 그가 좋아하는 영화를 많이 수입하고 직접 상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 동문에게 마지막으로 대학생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이 있느냐 물었다. 질문을 듣자마자 급하게 ‘있다!’며 말을 꺼냈다. 그는 대학생들에게 “너무 열심히 살지 마라!”라고 전했다. 너무 열심히 지금 세상이 요구하는 이치에 맞춰 살지 말라는 것이었다. 어차피 팔십까지 사는 인생, 삼십까지는 신나게 놀아도 된다고. 신나게 일하며 인생을 즐기는 영화쟁이 선배가 우리에게 남긴 마지막 말은 바로 이것이었다.

 

김연 기자 periodistayeon@yonsei.ac.kr
사진 박민석 기자 ddor-e@yonsei.ac.kr

저작권자 © 연세춘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