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림동 고시촌과 법현학사,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 엿보기

“그곳은 공기의 밀도부터 다른 곳이었다.”

한 고시생은 신림동 고시촌(아래 고시촌)의 첫인상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에게 고시촌의 낯선 풍경이 주는 시각적인 자극보다 먼저 감지됐던 건 동네 전체에 낮게 가라앉은 숨 막히는 공기였다. 황정윤(법학·08)씨도 선배를 따라 처음 고시촌을 찾았을 당시를 “뭔가 갑갑하고 우울했다”고 회상했다. “주택이 그렇게 많은데 골목에 아이들이 하나도 없었고 식사 시간이 되자 학원에서 학생 같지 않은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고시학원, 원룸, 서점 등이 밀집해 있는 관악구 신림9동 일대를 이르는 고시촌은 말 그대로 각종 고시를 준비하는 이들 모여 이룬 ‘고시생들의 마을’이다. 해마다 사법고시 1·2차 시험일이면 시험장소로 이동하는 응시생들로 고시촌 입구가 인산인해를 이룰 정도로 많은 이들이 이곳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 전체 합격자의 60~70%를 배출한다는 통계도 있다.

지난 1975년 서울대가 관악구로 이전하며 지방 출신 학생들이 그 인근인 신림9동 일대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이 고시촌의 시작이었다. 각종 고시 응시율이 높은 서울대의 특성상 서울대생들을 중심으로 활발한 정보교환이 일어났고, 점차 관련 학원, 업체, 시설이 몰리면서 현재와 같은 수험가가 형성됐다.

이를 바탕으로 고시촌만의 독특한 문화도 생겨났다. 이를테면 사법고시 2차생들은 1년을 4계절이 아니라 ‘5순환’으로 보낸다. ‘5순환’은 고시촌 학원가에서 운영하는 수험준비시스템으로, 이를 따라가면 모든 과목을 5번 복습하고 시험을 치게 된다. 또한 고시생들의 생활은 학원-독서실-집을 중심으로 이뤄지며 의식주가 거의 유사하다. 의(衣)는 돌려 입을 수 있는 2~3벌의 트레이닝복이며 식(食)은 고시식당*에서 해결한다. 주(宙)는 고시촌 일대에 즐비해있는 원룸들이다. 이처럼 일상 중 공유하는 부분이 워낙 많다보니 우스개로 “고시생들의 필기구는 모두 에너겔0.7” 같은 일반화를 하기도 한다.

고시촌을 처음 방문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황씨처럼 ‘우울’, ‘회색빛’ 등을 떠올리지만 막상 그 속에 있는 사람들의 생각은 다르다. 한때 고시촌에 살며 공부해본 경험이 있는 이지은(가명, 아동가족·07)씨는 “고시촌이 그렇게 우울하기만 한 곳은 아니다”고 말한다. 교류대상이 소수의 스터디원들로 한정되긴 하지만 그만큼 더 친밀해진다. 고시생들의 수험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공간도 많은데, 그래서 이 일대는 단위면적당 만화방, PC방, DVD방, 카페 최다 개수를 자랑한다. 업체들의 여닫는 시간 및 서비스 방식은 모두 고시생들의 생활패턴과 취향에 최적화돼있다. 물가도 싸다. 이렇다보니 여전히 고시생들 사이에는 “그래도 공부는 신림동”이라는 말이 돈다. 공부 외에 다른 데 신경 쓸 여지가 적기 때문이다.

우리대학교 안에도 고시생들이 모여 그들만의 문화를 형성한 곳이 있다. 동문에 위치한 법현학사다. 고시준비를 하는 법학과생들을 위한 100명 내외 소규모의 기숙사로, 법대 졸업생들의 기금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입사조건에 학과 제한이 있다. 사생들이 모두 같은 과 선후배들이라 법현학사의 분위기는 ‘나홀로족’들이 많은 고시촌과는 사뭇 다르다. 지난 2008년 8월부터 법현학사에 살고 있는 권예리(법학·08)씨는 “사생들끼리 모두 인사하고 지낼 정도로 가족 같은 분위기”라고 말한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사생들이 새로 들어오는 학기 초에 사생총회를 열어 전원이 자기소개를 하기 때문이다. 식당에서 만나면 같이 밥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밤에 야식을 시켜 먹으며 친해지기도 한다. 매 9월에는 체육대회가 있다. 하루 종일 진행되는 체육대회 뒤에는 술집을 빌려 뒷풀이도 한다. 권씨는 “격주로 있는 수요 삼겹살 파티 때는 식당이 왁작지껄해진다”며 법현학사의 화목함을 자랑한다. 그러나 고시준비라는 공통의 목표를 우선순위에 놓고 모인 집단이다 보니 공부에 관한 문제에서는 확실하다. 문고리마다 붙은 “문 살짝”이라는 문구에서 확인할 수 있듯, 늦은 시간에 씻거나 새벽까지 TV를 보는 등 조용한 분위기를 깨뜨릴 수 있는 행동들은 각별히 조심해야한다.

세상에 일면만 있는 것은 없다. ‘고시생’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떠올리게 되는 음울한 이미지들과는 달리 고시촌과 법현학사에도 그 곳만의 낭만, 그들만의 문화가 있다. 고(苦) 속에도 낙(樂)이 있는 법이다.

 

*고시식당 : 혼자 살며 밥을 잘 챙겨먹지 못하는 고시생들을 겨냥한 뷔페식 식당. 매일 메뉴가 바뀌며 월식(月食)으로 끊으면 가격을 할인해주기도 한다. 특정 식당으로의 몰림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 신림동 고시식당들은 합의하에 ‘월우수돈금계(月牛水豚金鷄)’의 원칙을 지킨다.

정지민 기자 anyria@yonsei.ac.kr
그림 김진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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