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기의 벽을 허문 ‘선홍빛’ 물결

지난 10일 고려대 운동장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로 가득찼다. ‘유혈낭자(有血娘子)’란 문구가 새겨진 천을 허리에 길게 감은 채 붉은 두건을 두른 수십명의 여자들이 분주히 오가고, 운동장 한가운데에는 거대한 무대세트가 세워지고 있었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자 드디어 여성문화기획단 ‘불턱’이 주관한 ‘99 1회 월경 페스티벌’의 막이 올랐다. 여성이면서도 쉽게 꺼내기 힘들었던 월경이란 ‘금기시된’ 단어를 행사의 제목으로 당당히 삼았다는 것부터가 이들이 저지를 반란(?)의 강도를 짐작케했다.
예상과 달리 소문을 듣고 몰려온 관중들 중 절반 이상은 남자들이었다. “솔직히 여성의 월경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었는데 이 행사를 통해 많은 걸 배울 것 같다”며 이번 행사에 대한 기대를 드러내는 김동준군(고려대 법학과·2)의 말처럼 남자 관중들의 시선에선 머쓱함 대신 진지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사회를 본 여성학자 오숙희씨는 “묻혀만 있었던 월경을 밖으로 끄집어내 남녀 모두가 이해를 공유하게 될 것”이라며 이번 행사가 축제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밝혔다.
임신 9개월째라는 김정은씨가 몸에 딱 달라 붙는 옷으로 불룩한 배를 드러낸 채 「해야」를 열창할 때에는 ‘임신한 여자는 그저 가만히 앉아 있어야 한다’는 통념이 보란 듯이 깨졌다. ‘아빠가 월경을 한다면’이란 주제로 공연한 이화여대 연극팀의 콩트는 여성 관객들의 통쾌한 웃음을 자아냈다. 여기엔 월경의 통증을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치부해버리는 남성들에 대한 조소와 비판이 섞여 있었다. 급변하는 조명, 격렬한 음악과 동작을 통해 막혀있고 묶여있던 월경의 ‘기’가 드러나는 과정을 표현한 고려대 퍼포먼스팀 ‘버섯전골단’의 『신에겐 딸이 없다』 공연은 행사의 절정을 이뤘다.
특별 이벤트로 마련된 ‘크라잉 넛’이나 ‘푸펑충 밴드’의 공연, 테크노 댄스 파티 등은 월경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관중들 스스로가 신나는 춤을 통해 떨쳐버리게 했다. 월경이란 숨죽여 얘기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열린 공간으로 내보내야 할 ‘신성한 것’이란 의미가 자연스럽게 체득되는 순간이었다. 이번 페스티벌에서는 ‘호주제 폐지 서명’이나 ‘월경 중 결석 인정 서명운동’ 등의 의미있는 부대 행사가 함께 펼쳐져 이 행사의 실질적 성과를 기대하게 했다.
“세상의 시각이 많이 달라진 것 같아요. 10년 전엔 월경에 관한 연극만 해도 온갖 야유를 감수해야했거든요.” 여성자체언론지 『두입술』의 편집위원 김유영양(인문학부·3)의 말을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이미 관중석과 무대는 공감의 열기로 뜨거웠다. 더이상 월경을 수치스런 금기사항이 아닌 정체성의 하나로 인식하려는 여성과 그것을 이해하게 된 남성이 함께 어우러진 ‘99 1회 월경 페스티벌’. 남녀 모두가 똑같은 ‘인간’으로 즐기는 진정한 평등의 열기가 ‘낭자’했던 축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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