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걸음, 느릴수는 있어도 서툴하지는 않아야

‘‘디자인’은 외관이고 ‘시스템’은 기능의 문제라고? 전혀 아니다.’ 세계 3대 경영학자로 꼽히는 톰 피터스 박사는 그의 저서 「에센셜-디자인」에서 위와 같이 이야기했다. 오세훈 서울시장 역시 지난 2월 22~23일 열린 ‘WDC 세계디자인도시서미트’에서 “디자인은 모든 것을 꾸미고 덧칠하는 게 아니라 시민을 안전하고 행복하게 만드는 모든 제반작업을 지칭한다”고 언급했다. 하지만 지금, 서울디자인수도사업(아래 디자인 사업)은 어떤 모습일까?

지난 2007년 10월, 서울은 축제분위기였다. 국제산업디자인단체 총연합회(ICSID) 총회에서 서울이 세계디자인수도로 지정, 발표됐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2년 남짓, 서울은 다양한 디자인 사업과 프로젝트, 전시행사, 박람회 등을 진행하며 숨 가쁘게 달려왔다. 하지만 앞만 보고 달리느라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이 있다. 디자인 사업이 시민들을 안전하고 행복하게 만들기는 커녕 오히려 여러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누가 어디를 가던 반드시 거쳐야하는 ‘거리’에서 시민을 불편하게 하는 많은 문제들이 제기돼 서울시의 공공디자인 정책에 대한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예쁘긴 한데 실용성이 없네요”


먼저 새로운 디자인의 거리 가로판매대(아래 가판대)가 문제였다. 1곳당 1천만원씩 들여 가판대를 바꿨지만 곳곳에서 허점이 드러났다. 비를 막아주는 천막의 폭이 판매대보다 좁아 좌우로 들이치는 비에 진열된 제품이 그대로 노출된 것이다. 또한 보행인의 통행에 지장을 준다며 외부 진열 공간을 아예 없앤 가판대도 등장해 상인들의 원성을 샀다. 실용성은 없고 겉멋뿐인 디자인이라는 항의가 빗발치자 서울시는 설치한 지 6개월도 안 된 가판대들을 보수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세금이 낭비됐다. 우리대학교 이현수 교수(생과대·주거환경)는 “시각적인 것을 너무 강조하다 보면 기능이 떨어지게 되는 측면이 있다”며 “충분한 시간을 두고 디자인한 것이 아니라 단기간에 진행하다 보니 소통의 부족으로 발생한 문제”라고 말했다.


걷고싶은 거리, 과연 걷고싶을까?

또한 서울시는 ‘디자인서울거리’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점자블록을 거의 깔지 않았고 기존에 있던 점자블록까지 철거했다. 하지만 몇 군데에 깐 검은색 점자블록이 문제됐다. 검은색 점자블록을 약시인 시각장애인들이 주변도로와 쉽게 구분하지 못하는데다 어두운 색깔 때문에 웅덩이 등으로 오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는 “시각장애인이 길을 걸을 권리를 빼앗은 것”이라며 불만을 표했다.

실개천은 시민들의 발이 빠지거나 휠체어 통행에 방해가 되고있다.


한편 대학로 혜화로터리부터 낙산공원길까지 630m구간은 보도 중간 중간에 약 30cm 깊이의 실개천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미처 실개천을 보지 못한 시민들이 걸려 넘어지거나 발을 빠뜨렸고,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통행을 방해받는 등 안전문제가 발생했다. 이에 서울시는 혜화로터리부터 ‘대학로약국’까지 40m구간에 강화유리를 걸쳐놓았고, 안전사고가 잦은 대학로약국부터 혜화역까지의 구간은 결국 실개천을 완전히 덮었다. 문화연대 문화정책센터 전지현 팀장은 “대학로 실개천, 시각장애인을 고려하지 않은 보도블록, 가로판매대 규격화 문제는 디자인거리조성사업의 핵심적인 오류”라며 “이 같은 문제들이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지 않은 서울시 행정의 대표적 예시”라고 꼬집었다.

서울시는 거리 한복판에 만든 실개천이 문제되자 급히 강화유리로 덮었다.

많은 사람들이 공공디자인에는 ‘소통’이 중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공공디자인에 많은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만큼 다양한 주체간의 대화가 충분히 이뤄져야한다는 것이다. 실제 외국에서는 디자인관련 사업을 시작할 때 해당 디자이너를 그 지역에 1년가량 머무르게 해 지역적인 요구나 이해관계를 충분히 수용할 수 있도록 한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서울의 디자인 사업 진행과정에는 주민참여가 형식적인 수준에만 머물 뿐 주민들의 의견이 거의 반영되지 않는 상황이다.

 

지속가능한 디자인을 위해


부족한 배려와 소통 외에도 큰 문제가 남아있다. 전 팀장은 “서울시는 역사, 문화를 자의적으로 재편한 일방적인 행정으로 의미 있는 것들의 가치를 훼손시키고 있다”고 언급했다. 디자인수도 관련 사업뿐만 아니라 서울시의 전반적인 공공디자인정책은 미관을 위해 시민들의 일상과 생존의 추억이 담긴 거리들을 너무 말끔하게 지우고 있는 것이다. 종로 세운상가 재개발 계획이 그 좋은 예다. 세운상가는 70년대 당시 ‘서울시의 불도저’ 김현옥 서울시장과 한국 현대건축의 1세대로 평가받는 건축가 김수근씨의 야심작이었다. 서울대 민성훈(디자인·04)씨는 “세운상가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의미있는 근대 건축물임에도, 불과 30년만에 철저하게 부정되고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고 말했다. 한옥이 보존해야 마땅한 우리의 역사이듯 세운상가가 가진 근대적인 의미 역시 분명하다. 미관상 보기 좋지 않다는 길거리 포장마차 역시 우리의 삶이 묻어나는 서울의 문화인 것이다. 서울시가 2010세계디자인수도의 비전으로 ‘지속가능한 디자인 서울’을 내걸었지만 지금 진행되는 수많은 사업들이 과연 얼마만큼의 생명력을 지닐지는 의문이 든다.

또한 이현수 교수는 “디자인을 하며 한국적인 것이 어떤 것인지 정체성을 보여줘야 하지만 아직까지는 지저분한 것을 깨끗하게 ‘정비’하는 수준에 머무는 것 같다”며 아쉬움을 표했다. 이어 “서울디자인수도 사업에서도 그런 한국적 디자인을 최대한 수용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국, 그리고 서울의 정체성을 올바르게 파악해 디자인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시인 김지하는 “아무래도 아시아 르네상스는 서울발(發)일 것 같다”고 말한 적 있다. 르네상스는 고대의 문화를 이상으로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려는 운동이었다. 과거의 서울을 지우고 새로운 서울을 만들기보다 과거를 끌어안고 시민들에게 편안한, 디자인적으로 한 단계 발전한 서울이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서울 르네상스, 나아가 아시아 르네상스의 시작이 아닐까.


김혜진 기자 2every1@yonsei.ac.kr
사진 박민석 기자 ddor-e@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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