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를 타고 김동리의 소설 「무녀도」의 배경인 경주 성건리 ‘예기청수’로 가는 길, 창문을 통해 쨍쨍한 햇살이 내리쬈다. 아직 쌀쌀한 서울의 날씨와는 달리 따뜻한 경주의 2월 날씨에 놀랐다.

김윤식 명예교수(서울대·한국현대문학사)는 그의 저서 『김동리와 그의 시대』에서 “작가는 작품을 씀으로써 자기 삶을 실천하며, 이를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관계가 김동리와 「무녀도」”라고 말했다. 김동리는 「무녀도」를 30여 년 동안 세 번이나 개작했으며, 「무녀도」 발표 후 42년 뒤에는 주인공들의 이름이 달라졌지만 본질적으로 「무녀도」와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는 장편소설 『을화』를 발표했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한 작가가 전 생애에 걸쳐 이처럼 한 가지 주제에 매달린 경우는 흔치 않다”며 “이는 그만큼 이 주제가 작가에게 절실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만큼 김동리와 「무녀도」는 긴밀한 관계이며 따라서 김동리의 고향이자 「무녀도」의 배경인 경주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 장소인 것이다.

하지만 경주에서 김동리와 「무녀도」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예기청수에서 가까운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에 도착해 학생들과 경비원 아저씨들에게 예기청수의 위치를 물었지만 그 위치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신 선사시대 유적인 석장동 암각화의 위치만 알려줄 뿐이었다. 결국 서울에서부터 준비해간 지도를 보며 주변 일대의 산을 이리저리 오르며 두리번거리다가 ‘예기청소’라고 쓰인 표지판을 발견했다.

그녀가 스러져간 검은 물

경주읍 성 밖 조그만 마을, 도깨비굴 같이 낡고 헐린 집 속에는 무녀 모화와 그녀의 벙어리 딸 낭이가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십여 년 간 생사도 모른 채 지내던 아들 욱이가 불쑥 찾아온다. 그러나 상봉의 기쁨도 잠시 욱이는 두 모녀에게 알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존재가 됐다. 그는 음식을 받아놓고나, 밤에 잠을 자려고 할 때나, 아침에 일어나면 한참 동안씩 눈을 감고 입술이 달싹달싹하며 주문 같은 것을 외웠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틈틈이 품속에서 조그만 책 한 권을 꺼내 읽곤 했다. 낭이가 그것을 수상하게 보고 있으니 욱이는 미소를 띠며 “너도 이 책을 읽어라”라며 그 조그만 책을 낭이 앞에 펴 보였다.욱이가 내놓은 그 책의 껍데기에는 큰 글자로 ‘신약전서’란 넉 자가 쓰여 있었다.

“우리 사람과 천지 만물을 만드신 것은 하느님이다”라는 욱이의 ‘하느님’은 며칠 지나지 않아 곧 모화의 의혹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이는 욱이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동안 수백 번의 굿을 하고 수백 수천 명의 병을 고쳐온 모화의 치유력을 욱이는 믿을 수 없었다. 욱이가 보기에 모화에게는 무당 귀신이 들려 있고 낭이에게는 귀머거리와 벙어리 귀신이 들려 있을 뿐이었다. 둘의 보이지 않는 갈등이 계속되던 어느날 밤, 욱이는 잠결에 언제나 품속에 품고 있던 성경책을 더듬어 찾았지만 품속은 허전했다. 방 밖에서는 웅얼거리는 주문 소리가 들려왔다. 방에서 부엌으로 난 구멍을 통해 보자, 모화는 소복을 입고 손을 비비다, 절을 하다, 덩싯거리며 춤을 추고 있었다. 부뚜막 위에는 깨끗한 접싯불이 켜져 있고, 접싯불 아래 놓인 소반 위에는 냉수 한 그릇과 흰 소금 한 접시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곁에서 신약전서의 두터운 표지는 이미 파리한 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방에서 뛰어나온 욱이는 모화가 있는 부엌으로 박차고 들어가 소반 위의 냉수 그릇을 집어 들려 했다. 그러나 그가 냉수 그릇을 집어 들기 전에 모화의 손에 들린 식칼이 욱이 앞에서 춤을 췄다. 피투성이가 된 그의 몸은 허옇게 이를 악물고 웃고 있는 모화의 품속에 안겨 있었다.

그렇게 몇 달을 앓던 욱이가 세상을 뜨자, 모화는 아주 미쳐버렸다. 사람들이 이런 모화를 안타까워할 즈음, 모화의 마지막 굿이 열린다는 소문이 돌았다. 한 여자가 예기청수에 몸을 던진 것이다. 죽은 혼백을 구하려는 모화는 밤중까지 춤을 덩싯거리고 너울거렸다. 모화는 넋을 건진다는 넋대를 따라 점점 깊은 물속으로 들어갔다. 검은 물은 그녀의 허리를 잠그고, 가슴을 잠그고 점점 부풀어 올랐다. “가자시라 가자시라 이수중분 백노주로, 불러주소 불러주소 우리 성님 불러주소, 봄철이라 이 강변에 복숭꽃이 피거덜랑, 소복단장 낭이 따님 이내 소식 물어주소, 첫 가지에 안부 묻고, 둘째 가…” 모화의 목소리는 차츰 멀어지고 그녀의 몸도 물속으로 아주 멀어져갔다. 

경주, 김동리와 그의 문학의 고향

예기청수는 형산강의 지류인 서천이 빙빙 돌아 흐르는 강으로 김동리는 예기청수와 주변 숲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자연히 김동리는 예기청수와 관련된 이야기를 많이 쓰게 됐다. 예기청수에서는 해마다 사람이 빠져죽고 그를 둘러싼 전설들이 전해 내려왔기 때문이다. 굿을 하다가 예기청수에 스스로 몸을 담근 「무녀도」 속 모화의 이야기 역시 그 중 하나다. 이렇게 김동리는 그의 소설을 통해 자신의 고향과 자연을 전설화했다. 경주는 작가 김동리 자신의 고향일 뿐만 아니라 그의 소설의 문학적 고향이기도 한 것이다.

또한 김동리는 어려서 어머니와 친형 김범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불교 신자였던 어머니와 철학을 공부한 형덕에 김동리의 정신세계에는 자연스럽게 샤머니즘과 풍류, 그리고 동양철학의 원형인 도교와 불교가 깔려 있었다. 따라서 그는 일제 식민지 말기, 소위 ‘모더니티’가 밀려들어오던 그 시기에 오히려 더 우리의 향토적인 소재에 더 집중할 수 있었다. 다른 이들은 전통을 미신으로 치부하고 무시하던 근대와 전통의 충돌 시대에, 그는 「무녀도」나 「등신불」 같은 그의 대표작에서 우리 민족의 고유한 삶을 그려냄으로써 한국 문학의 자존심을 지켜냈다. 무조건적으로 모더니티를 지향하던 한국문학의 방향성이 김동리에 의해서 중재될 수 있었던 것이다.

빛을 잃은 예기청수

2010년에 만난 예기청수는 그리 깊지 않아보였다. 10층, 20층, 그리고 60층이 넘는 고층빌딩에 익숙한 우리에게 그리 깊지 않은 예기청수는 소박한 강일뿐이었다. 아들을 잃은 슬픔에 잠긴 모화가 스러져간 예기청수가 이제는 작은 아파트 단지 앞에 있는, 그저 얕은 냇물이 되어버렸다. 너무나 새파래서, 너무나 깊고 캄캄해서 자기도 모르게 빠져버릴 것 같은 강물일 것이라 기대하고 찾은 예기청수는 이제 양끝이 모두 아파트로 둘러싸인 회색빛 강이었다. 예기청소라는 표지판이 꽂혀 있던 산 위에서 강물을 내려다보자 수많은 아파트들과 크고 웅장한 건물들이 물에 반사되어 강 아래 언뜻 보이는 모화의 모습을 흐리게 했다. 마을 사람들 모두가 모여드는 굿판이 벌어져 왁자지껄했던 예기청수는 이제 이따금 아버지와 아들이 찾아와 낚시를 하는 그런 소박한 강이 돼 있었다.


김연 기자 periodistayeon@yonsei.ac.kr
사진 정석현 기자 remijung@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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