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책의 출판 가치는 내가 판단한다, 만인 저자 시대

에스프레소 머신은 곱게 간 원두에 증기의 압력을 가해 단숨에 커피를 추출해낸다. 한 잔을 뽑는 데 걸리는 시간은 약 30초. 인쇄기를 가동시키는 데만 30분이 넘게 걸리는 책을 에스프레소 뽑듯 단숨에 찍어내는 기계가 있으니 ‘에스프레소 북 머신’이다. 콘텐츠를 입력하면 제본까지 완료된 페이퍼백이 ‘뽑아져’ 나온다. 300쪽 정도의 책 한 권을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은? 대략 5분 내외다.

「타임」지는 이 기계를 2007년 올해의 발명품으로 선정했다. 그런데, 책을 즉석에서 빠르게 인쇄할 수 있게 된 것이 그렇게 엄청난 발명일까? 사실 기계의 원리나 구조 자체는 간단하다. 이 기기를 처음으로 도입한 영국의 블랙웰 서점을 취재했던 「한겨레」 구본권 기자는 “에스프레소 북 머신은 대학가 제본소에서 사람이 일일이 하던 일을 자동화했을 뿐 소박한 규모의 기계”라 말했다. 이 기계의 진가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먼저 출판산업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간단하지만 획기적인 발명 

인쇄는 규모의 경제가 적용되는 분야로 대량생산에 적합하다. 비싼 인쇄·유통비용을 감당하려면 책이 일정 부수 이상 팔린다는 보장이 있어야 한다. 절판됐을 경우 소량만 추가로 인쇄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이러한 전통적인 출판구조 속에서 분명 수요가 있지만 크지는 않은 책들은 출판사로부터 외면 당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같은 출판구조 때문에 에스프레소 북 머신이 빛을 발할 수 있다. 짧은 시간도 장점이지만 그보다는 대량생산을 기본으로 하는 기존 방식의 한계를 극복한 소량인쇄기기라는 점이 더 중요하다. 편집된 콘텐츠만 있으면 누구나 손쉽게 책을 찍을 수 있다는 점 또한 획기적이다. 이런 기기를 이용하면 출판사가 거절한 책들도 개인의 이름으로 세상에 나와 독자와 만날 수 있게 된다. 구 기자에 따르면 에스프레소 북 머신을 이용하기 위해 블랙웰 서점을 찾은 대부분의 손님도 이러한 개인출판을 하려는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에스프레소 북 머신이 아니라도

그러나 아직 에스프레소 북 머신을 국내에서 만날 수는 없다. 현재 이 기기가 설치된 곳은 위 서점과 북미, 호주, 뉴질랜드 등지의 몇몇 도서관뿐이다. 하지만 꼭 이 기계가 아니라도 비슷한 방식의 소규모 자비 개인출판은 이미 가능하다. 주문형 도서 출판(Print-on-demand: POD, 아래 POD)을 통해서다. 출판하고자 하는 콘텐츠를 가지고 POD 전문회사를 찾으면 편집, 제본은 물론 국제표준도서번호(ISBN)를 받고 신간으로 등록하거나 국립중앙도서관에 납본하는 과정까지도 대행해준다.

한국출판연구소 백원근 연구원은 “과거에 비해 POD 업체들이 확실히 성업중”이라며 그 요인으로는 사람들의 지적 수준이 높아짐에 따라 출판에의 욕구 또한 증가하게 된 점을 꼽았다. 출판대행사 파랑새미디어의 우현 대표는 “사회가 다변화되고 삶이 여유로워지면서 사람들이 무언가 세상에 남기고자 하게 된 것”이라 분석했다. 백 연구원은 “현재 미국에서는 전체 출판물의 절반이 이렇게 만들어진다”고 말했다. 이 책들의 목차는 아마존과 같은 인터넷 도서판매 사이트에 올라 주문판매된다. 독자들의 반응이 좋을 경우 출판사가 출판을 제의하는 일도 있다. 백 연구원은 우리나라 또한 앞으로 이러한 흐름이 더 확대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내다봤다.

책이 처질화된다?

개인출판은 전통적인 출판구조의 틈새를 노렸다. ‘대량’으로 ‘팔릴’ 책이 되기 위해서는 대중적 취향과 어느 정도 타협이 불가피하다. 이는 필연적으로 좁은 분야를 깊게 다루거나 소수의 관심만을 받는 책들의 입지를 좁히고 평범한 사람들이 출판에 참여할 수 있는 벽을 높이게 된다. 개인출판의 등장은 꼭 출판사를 거치지 않아도 책과 독자를 이어줄 새 통로를 열었다. 책의 가치에 대한 판단을 출판사에 맡기지 않고 저자 스스로 하게 된 것이다. 참신한 신인 발굴의 기회 또한 확대시켰다.

일각에는 이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존재한다. 2009 파주 북시티 국제출판포럼에 발제자로 참가한 북센 디지털사업본부 이중호 본부장은 이러한 흐름에 대한 기대를 드러내는 동시에 “저질의 콘텐츠나 표절 콘텐츠 등을 어떻게 걸러내고 유통시키느냐가 관건”이라 지적했다. 이에 대해 백 연구원은 “출판을 통해 자신을 표현할 자유는 누구나 존중 받아야 한다”며 “메뉴가 다양해진 것이지 출판물의 질과는 별개의 문제”라고 말했다. 구 기자 또한 “폭넓은 스펙트럼의 책들이 공존하는 출판문화가 될 것”이라 전망했다.

출판의 문턱이 낮아지고 있다. 에스프레소 북 머신 같은 간편한 소형 기기가 보급된다면 이런 추세는 더욱 가속화될 것이다. 이제 저자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낮아진 문턱을 넘어설 조금의 용기뿐인지도 모른다.

 

  정지민 기자 anyria@yonsei.ac.kr 
그림 김진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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