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을 따라 걸으며 조선시대 임금과 백성의 고환을 느끼다

7월의 남한산성은 푸른 눈에 덮여 있는 것 같았다. 하늘과 맞닿아 있는 듯한 성벽, 산성의 정문인 남문까지 가파르게 연결 된 길, 무성한 생명력을 자랑하는 짙푸른 나무들. 그 어디에서도 약 400년 전 겨울에 있었던 전쟁의 흔적은 찾기 어려웠다. 오로지 남한산성을 안내하는 표지판만이 지울 수 없는 역사의 자취를 담고 있었다.

수성을 위해 산성으로

그날 어가행렬은 강화를 단념하고 남한산성으로 향했다. 행렬이 방향을 바꾸자 백성들이 수군거렸다. 어린아이들도 강화가 아니라 남한산성으로 간다는 것을 알았다.

정문인 남문에 도착하자 평일에도 등산을 즐기려는 사람들로 붐볐다. 성벽을 따라 그늘을 드리운 소나무 숲은 소설 속 모습 그대로였다. 복작 거리던 마을은 잘 조성된 공원이 대신하고 있었다. 남문에서 서문으로 길을 잡고 출발했다. 서문으로 가는 길은 산세가 가파른 곳이다. 그만큼 높기도 높아 산성 내·외부의 모습을 가장 잘 관찰할 수 있다.

규국이 작아서 품이 좁고, 외가닥이어서 한번 막히면 갇혀서 뚫고 나가기가 어려우며, 아군이 성문을 닫아걸고 성첩을 지키면 멀리서 깊이 들어와 피곤한 적병이 강가의 너른 들에서 진을 치고 앉아 힘을 회복할 수 있고, 성 밑이 가팔라서 안에서 웅크리고 견딜 수는 있으나 나아가 칠 수가 없으며……

남한산성은 흔히 웅크리고 있는 형세를 하고 있다고 일컬어진다. 그만큼 방어하기는 쉬우나 나가서 적을 공격하기는 어려운 형세인 것이다. 결국 남한산성 안에서 전쟁을 치른다는 것은 시간과의 싸움이자, 자신과의 싸움이라 할 수 있다.

서문으로 향하는 길에 위치한 정자에 다다르니 성벽 너머로 너른 들판이 아련히 보였다. 풍요의 상징이었던 너른 들판은 병자호란 당시 청병의 취사 장소가 되면서 남한산성 안 백성들을 위협하는 장소였다. 주화파인 최명길과 척화파인 김상헌, 그리고 그들의 주장을 둘러싼 왕의 고민이 소설 남한산성을 구성하는 하나의 축이라면, 성 안의 백성들은 또 다른 축을 담당한다.

목숨을 걸고 왕의 칙서를 전하는 대장장이 서날쇠, 뱃사공이었던 아비를 잃은 나루, 김상헌을 강 너머로 건네주었던 나루의 아비, 그리고 뜨거운 물에 간장을 타먹으며 추운 성을 지키던 병사들. 이들은 대의를 논하지 않는다. 예의도 논하지 않는다. 다만 살길을 찾을 뿐이다. 오늘 임금을 강 너머로 모신 뱃사공은 내일 청병을 도와 살길을 찾으려하고, 병사들은 나라고 벼슬이고 무용지물이니 곡식을 달라한다. 벼슬을 약속하며 나라를 사랑하는데 위아래가 어디 있겠냐는 김상헌의 말에 서날쇠는 “먹고 사는 데는 위아래가 있었지요”라고 답한다. 이들은 결국 전쟁, 명분, 대의가 모두 생존의 문제임을 허위나 가식 없이 보여준다.

견딜 수 없는 싸움을 견디다

청병이 가장 강한 압박을 가해왔던 서문을 지나 북문으로 향하는 길은 지나왔던 길보다 가팔랐다. 오후가 되어 더 강하게 내리쬐는 햇빛 때문에 울창한 숲의 어두운 그림자가 더 짙어졌다.

-견디어? 견딜 수가 있겠는가.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디자는 것입니다. 

남한산성에서의 싸움은 고요했다. 적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추위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점 심해지는 굶주림과, 굽힐 것인가 아니면 꼿꼿이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의 싸움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문은 예외였다. 청병들은 삼전나루에 본진을 차리고 서문과 북문 쪽을 강하게 압박했다. 영의정 김류는 이 북문에서 남한산성에서 벌어진 전투 중 가장 치열했던 전투를 치러낸다. 치열했던 만큼 패배의 아픔도 컸다. 북문으로 오자 경사진 언덕을 따라 무너져 내린 흙과 풀뿌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청병들은 이 산자락에 포탄을 날렸고 야포를 쏘아댔다. 피가 붉게 물들였던 눈은 자취가 없고 풀이 무성한 성벽은 말없이 강렬한 햇볕은 견디고 있었다.

북문을 거쳐 동문에 가까워오자 유달리 허물어진 성벽들이 많았다. 북문에서 동문으로 가는 길은 가파른 오르막과 깎아지른 듯한 내리막의 연속이었다. 대장장이 서날쇠는 이 길에 설치된 배수구를 따라 왕의 칙서를 전하러 갔던 것이다. 병사들은 이 길에서 동상으로 인해 떨어져나간 손가락을 슬퍼했을 것이며 자신들의 깔개로 먹인 말의 고기를 씹었을 것이다. 김상헌과 영의정이 지나갈 때마다 야유를 퍼부었던 곳도 이 길이었을 것이다. 행궁안의 조정에서는 말(言)과 뜻의 싸움이 치열했다.

오욕 속에 피어나는 삶의 꽃

전하, 죽음은 견딜 수 없고 치욕은 견딜 수 있는 것이옵니다. 그러므로 치욕은 죽음보다 가벼운 것이옵니다. 군병들이 이 기한을 견디듯이 전하께서 견디고 계시니 종사의 힘이 옵니다. 전하, 부디 더 큰 것들도 견디어주소서.
적이 비록 성을 에워쌌다 하나 아직도 고을마다 백성들이 살아 있고 또 의지할 만한 성벽이 있으며, 전하의 군병들이 죽기로 성첩을 지키고 있으니 어찌 회복할 길이 없겠습니까. 전하, 명길을 멀리 내치시고 근본에 기대어 살 길을 열어 나가소서.

‘삶의 길은 성 밖에 있다’는 최명길의 뜻과 ‘어려울 때일수록 근본을 세워 기강을 바르게 하고 명을 섬기는 뜻을 지키자’는 김상헌의 주장은 시비를 가릴 수 없었다. 치욕을 견디고 삶의 자리를 보존하고자 하는 뜻과 견디고 있는 백성들의 뜻을 굳게 하여 끝까지 근본을 지켜야 한다는 뜻은 모두 그 나름의 정당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왕은 백성들의 삶을 선택했다. 그러나 결국 누군가 감당해야했을 오욕의 자리를 지켰던 것은 최명길이었다.

왕조가 쓰러지고 세상이 무너져도 삶은 영원하고, 삶의 영원성만이 치욕을 덮어서 위로할 수 있는 것이라고, 최명길은 차가운 땅에 이마를 대고 생각했다.

소설 『남한산성』 속 인조의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는 절망적이지 않다. 그는 머리를 땅에 대며 흙냄새를 맡는다. 볕에 익어 향기로운 흙, 그 흙냄새 속에서 살아가야 할 날들을 생각한다. 추운 겨울을 견디고 솟아오른 냉이들, 똥물 속에서 꽃이 피어오르는 환영을 보는 김상헌. 김훈은 끊임없이 살아남는다는 것의 의의를 이야기하며 희망을 말한다. 서날쇠가 성 안으로 들어오던 날 나루는 초경을 흘린다. 초경을 흘린다는 것은 곧 또 다른 생산, 또 다른 삶의 가능성을 말한다. 살아남았기에 다음을 기약할 수 있으며 살아남았기에 또 다른 시작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치욕을 견디고 맞이한 새로운 시간, 새로운 봄을 살아나갔던 사람들의 자손들은 오늘도 남한산성 너머로 보이는 삶의 터전들을 지켜가고 있다.

7월, 남한산성을 가득 메운 나무들의 강렬한 생명력은 왕왕 소리 없는 울림을 일으키고 있었다.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땅에 머리를 찧는 청나라의 항복 양식

김규민 기자 memyself_i@yonsei.ac.kr
사진 정석현, 추유진 기자 babyazaz@yonsei.ac.kr

저작권자 © 연세춘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