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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곳에 인권따위는 없었다”의정부에 위치한 기지촌에 가다
  • 유수진 기자
  • 승인 2009.10.10 14:00
  • 호수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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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성이 어렵사리 입을 뗐다.

“난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살았다. 월급은 없는데 빚이 많아 몸을 팔지 않으면 현상유지조차 할 수 없었다. 얼굴을 다쳐 140바늘을 꿰맸지만 주인은 클럽에 나오지 않는다며 욕을 하고 때렸다. 아무리 싫어도 주인이 가서 일하라고 하면 클럽에 들어가야만 했다.”

좁고 굽은 길을 따라가면 집과 가게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여기저기 써 붙여진 방을 빌려준다는 글귀와 영어 간판들에 시선이 머문다. 흡사 외국에 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익숙지 않은 풍경이다. 바람이 불어 열린 철문 밖으로 검은 피부의 소년이 고개를 내민다. 외부인을 경계하는 눈빛을 보이더니 자전거를 타고 쏜살같이 달려간다. 영업을 하고 있는 가게보다 비어 있는 곳이 더 많아 오고가는 사람을 찾기 어렵다. 너무 한산하고 조용해 을씨년스러운 느낌마저 드는 이곳은, 의정부에 위치한 기지촌이다.

사람은 있지만 인권이 없는 기지촌

미군이 주둔하기 시작한 지난 1950년대 이후로 의정부를 비롯해 동두천, 평택 등 40여 곳에 기지촌이 형성됐다. 기지가 생기면서 기지 주변에는 미군을 대상으로 하는 상권이 형성됐고, 하나 둘씩 사람이 모여들었다. 기지촌의 사전적 정의는 외국 기지 주변에 형성된 촌락이지만 원래는 논밭이었던 자리에 클럽과 유흥업소가 들어서면서 사회적 의미가 달라졌다. ‘미군기지 주변의 유흥가’라는 인식이 더 강해진 것이다.

클럽에서는 성매매가 빈번히 이뤄졌다. 클럽에서 일하는 여성들은 성추행을 참아가며 주스를 팔아야 했고 2차 성매매도 나가야 했다. 포주들의 횡포도 심각했다. 과거에 클럽에서 일을 했던 한 여성은 “포주들의 말과 행동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라며 “아가씨들은 아예 사람 취급을 안 해줬다”고 말했다. 일하는 여성들의 삶은 정육점에서 내다버린 돼지비계를 주어다 김치찌개를 끓여먹어야 했을 정도로 참혹했다. “아무리 힘들어도 포주가 시키면 일하러 나갔다”며 “인권은 커녕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으며 살았다”고 말하는 그의 얼굴에서 다시 떠올리기조차 싫은 기억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당시 의정부에는 11~13개의 클럽이 있었다. 각 클럽마다 10여 명의 여성들이 있었고, 따로 방을 얻어놓고 윤락을 하는 여성도 있었다고 하니 총 250~300명 정도의 여성이 기지촌에서 일했던 셈이다. 기지촌 여성들의 삶을 위해 활동하고 있는 두레방의 채고운 간사는 “그 당시 국가가 기지촌 여성을 애국자나 민간외교관이라 칭했으며, 미군으로부터의 수입이 국가 경제를 발전시키는 힘이 된다고 부추기는 경향도 있었다”고 말했다. ‘국가가 포주’라는 말처럼 술을 팔거나 성매매 하는 것을 나쁘다고 인식시키기보다는 장려했고, 심지어 성병 진료소를 만들어 여성들에게 검진을 받게 했던 증거도 남아있다고 했다.

지난 90년대 이후로는 러시아, 필리핀 여성들이 기지촌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가수나 밴드 활동을 하는 줄 알고 한국에 왔으나 미군에게 술이나 주스를 팔고 성매매를 나가야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매니저에게 여권을 빼앗기고 부당한 계약서인줄 알면서도 서명을 해야 했다. 돈을 벌게 해 주겠다며 눈속임으로 데려와서는 다른 클럽으로 넘기는 인신매매도 자주 일어났다. 미군들은 가족수당을 받기 위해 외국인 여성들과 결혼을 하고서는 아무런 말도 없이 고국으로 돌아갔다. 남겨진 여성들은 추방당하지 않기 위해 다시 클럽으로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기지는 사라지지만 문제는 남는다

의정부 기지촌은 현재 쇠퇴의 길을 걷고 있다. 5개의 미군기지가 평택으로 통합되고 일부 미군이 철수하면서 상권이 무너졌고, 클럽들도 줄줄이 문을 닫았다. 일부 여성들은 클럽을 따라 타 지역으로 거처를 옮기기도 했다. 간판은 남아있지만 영업을 하지 않는 클럽이 대부분이라 나이가 들어 매니저나 허드렛일을 하며 생계를 잇던 여성들은 기본적인 생활조차 어려워졌다. 현재 남아있는 기지 3개도 곧 평택으로 이전될 예정이지만 빈 땅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는 아직 논의 중이다.

두레방의 채간사는 “기지 반환 후에는 독일의 보봉, 일본 오키나와의 사례를 벤치마킹한 환경정화를 통해 생태적인 발전을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경제적 이해관계로 인해 기지촌이 개발되면 기지촌 여성들이나 주민들이 삶의 터전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채간사는 “그들을 위한 공간이 마련되면 좋겠지만 정화를 위한 비용 등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직 많아 더 고민해봐야 한다”며 “환경정화에 실패해 성매매 집결지가 된 필리핀의 사례 또한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지난 2008년에 동두천, 파주, 평택, 의정부에서 기지촌 생활을 했던 여성들을 대상으로 실태조사를 했다. 그 결과 가장 어려운 점으로 주거문제가 꼽혔다. 가장 젊은 여성이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정도 되다보니 일을 하더라도 벌어들이는 수입이 얼마 되지 않아 월세를 내며 근근이 살아가기도 어렵다는 것이었다. 또한 기지촌 여성들에 대한 의료지원도 매우 빈약하다. 연령제한이 있고 생계의 어려움을 증빙해야 하기 때문에 실질적인 도움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채 간사는 “여성분들이 기지촌에 살았다는 것을 밝히는 것조차 어려워하신다”며 “오가시는 분은 많지만 속을 털어놓고 도와달라는 말씀은 잘 못하신다”고 말했다. 여성들은 항상 가난했고 착취를 당했으며 미군의 부정적인 영향만 고스란히 받았다. 한 때 국가는 ‘달러’를 벌어온다고 기지촌 여성들을 격려했지만 그 후로는 그들을 철저히 외면하고 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지켜줘야 한다

두레방은 과거 생활로 인해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여성들과 전쟁고아로 기지촌에 오게 된 여성들을 돕기 위한 활동을 하고 있다. 생계를 이어나가기 어려운 여성들에게 생활비를 지원해주고 사회보장제도의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연계해주기도 한다. 또한 상담소를 운영하며 여성들의 사연을 들어주고 법률지원, 의료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자그마한 공간이지만 이곳저곳에 기지촌 여성들을 향한 애정이 깃들어있다. 하지만 이렇게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 활동가는 유영님 원장을 포함해 5명밖에 되지 않는다.

채간사는 여성들을 위해 힘써줄 활동가가 많지 않은 이유로 “여성 문제 중 가장 관심이 낮은 부분이 성매매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사회복지사나 여성 활동가들조차도 성매매의 상황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며 접근성도 떨어지기 때문에 선뜻 다가서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여전히 국내에는 기지촌이 존재하고 성매매가 이뤄지고 있지만 그들의 인권을 대변해줄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과거의 아픔을 지닌 채 살아가는 기지촌 여성들은 하루하루가 힘들지만 아무도 그들에게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 잔혹할 정도의 인권침해를 당했지만 피해자만 있고 가해자는 없다. 그저 그때는 살기위해 어쩔 수 없었다며 합리화하고 침묵만 지킨다. 평생을 외롭게 지냈던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작은 관심이다. 그들의 안정된 삶을 위해 정부의 지원과 사람들의 따뜻한 손길이 필요한 시점이다.

유수진 기자 ussu@yonsei.ac.kr
사진 박민석 기자 ddor_e@yonsei.ac.kr

유수진 기자  ussu@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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