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치마에 군데군데 헤진 갈색 재킷, 심장 부위만 동그랗게 도려내진 짧은 검은 머리의 여성. 여성의 뚫린 심장 부위를 관통하고 있는 긴 각목. 그 밑으로 보이는 커다란 심장과 심장을 중심으로 강처럼 흐르는 피. 이것은 ‘사실’일까, 아니면 환상일까?

앞에서 묘사한 광경은 멕시코의 여류화가 프리다 칼로의 작품 「가슴 아픈 기억」이다. 수년간 프리다 칼로에 대해 연구해온 안토니오 로드리게스는 “프리다 칼로는 초현실주의자가 아니며 오히려 현실에 깊게 뿌리박은 화가, 특출나게 ‘사실적인’화가”라고 표현한다. 사람들은 흔히 ‘사실’을 실제 우리 생활에서 물리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프리다 칼로에게는 가슴만 뻥 뚫려버린 여인과 강물처럼 흐르는 심장의 피 역시 ‘사실’이다. 여성 편력이 심했던 남편과 교통사고로 인한 극심한 후유증, 그로 인해 아이를 낳을 수 없는 현실이 그녀에게 눈 속에서 그릴 수 있을만큼 ‘실재적’인 고통을 가져다줬기 때문이다.

프리다 칼로의 작품이 내면적 사실을 외부로 표현했듯,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환상, 설화와 전설 등을 혼합해 자신이 속한 사회를 문학적으로 구현해낸 사람들이 있다. 바로 라틴 아메리카 소설의 ‘붐’을 이룩해낸 1960년대 라틴 아메리카의 ‘붐 소설’ 작가들이다.

환상 속 현실, 현실 속 환상

소위 ‘붐 소설’이라고 불리는 라틴 아메리카의 문예 사조는 1940년대에 시작돼 1960년대에 전성기를 맞는다. 이 장르의 특성을 가장 잘 나타내는 단어가 바로 ‘마술적 사실주의’다. 당시 라틴 아메리카 소설들을 보면 ‘환상’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하다. 분명 일상적인 생활이 이뤄지고 있는 가운데 여인이 하늘로 승천한다든가, 우연과 예언이 맞아떨어진다든가 하는 일들이 벌어진다. 중요한 점은 일상적인 삶을 영위해가는 소설 속의 인물들이 이처럼 비현실적인 일들의 발생을 마치 일상의 일부인 것처럼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사실의 의미를 넘어서서 프리다 칼로가 말한 사실의 의미를 고려하면 왜 환상과 현실이 한데 버무려진 라틴 아메리카 소설이 마술적이라는 형용사 뒤에 ‘사실주의’라는 꼬리표를 얻게 됐는지 알 수 있다.

라틴 아메리카의 눈물을 먹고 자라다

마술적 사실주의가 라틴 아메리카에서 발달할 수 있었던 토양은 바로 라틴 아메리카의 특수한 역사적 상황이다. 라틴 아메리카가 서구 열강의 지배를 받던 시절, 원주민 및 메스티소들에게는 공식적 신분상승 통로가 차단돼 있었다. 개인의 노력으로 자신이 처한 삶의 조건을 개척할 수 없었던 현실 속에서 사람들은 종교나 인디오 사이에서 발달했던 민간 제의를 통해 위안을 구했다. 이는 20세기까지 지속됐고, 결국 식민시대와 같은 구조가 고착되면서 식민시대 사회의 민간제의나 종교적 행위를 통한 위안이 마술적 사실주의의 토대가 됐다.

한편 마술적 사실주의는 라틴 아메리카의 문화적 정체성을 상징하기도 한다. 20세기 들어 라틴 아메리카 내에서는 미국 중심의 신식민주의적 지배질서에 대한 저항이 강해졌다. 더불어 자신들이 속한 사회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졌다. 따라서 서구적 관점에서 미개한 것으로 폄하했던 주술적 제의, 마술적 세계관을 서구에서 이성이 차지하는 위치와 동등하게 상승시키려는 노력이 이뤄졌다. 이 노력의 일환으로 마술적 세계와 사실적 세계의 공존이 가능함을 보려주려 했던 것이다. 고려대학교 국제어학원 박병규 강사는 이에 대해 “문맥적 의미로는 현실적인 요소와 비현실적인 요소의 공존을 뜻한다”며 마술적 사실주의의 정전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인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동안의 고독』을 들었다. 실제로 『백년동안의 고독』 속에서 마꼰도의 사람들은 일상적 삶을 영위하고 있지만 그 와중에서도 끊임없이 여성 인물의 승천, 개미떼에 의한 멸망 등 환상적인 요소가 일상적으로 등장함으로써 도리어 불안정한 느낌을 자아낸다.

마술적 사실주의, 여전히 논의 중?

그러나 마술적 사실주의는 라틴 아메리카의 문학을 대표하는 용어로 사용되지만 학계에서는 여전히 논의 중인 개념이다. 우선 마술적 사실주의는 ‘사실주의’라는 개념을 사용함에도 불구하고 환상적인 요소가 작품 자체에 녹아있기 때문에 환상주의 소설과의 경계가 문제된다. 나아가 마술적 사실주의가 라틴 아메리카의 문화적 자아찾기의 산물이라는 분석에도 불구하고 서구문화와의 구별이 가능한가에 대한 문제제기가 지속된다. 이에대해 서울대학교 라틴아메리카연구소 우석균 교수는 “서구문학기법과의 유사성 때문에 마술적 사실주의를 보편적 문학 현상으로 느낄 수 있지만 라틴 아메리카 마술적 사실주의의 역사적·문화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보편적 문학현상으로 규정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며 “마술적 사실주의는 후기표현주의, 초현실주의, 환상 문학과 역사적으로 전혀 다른 맥락에서 탄생한 라틴 아메리카 근대성의 주요 표명 양식”임을 밝혔다.

마르케스는 자신의 작품 『백년동안의 고독』에 대해 “마술적 세계가 아닌 누구나 접하는 중남미의 일상적 ‘현실’을 담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어쩌면 마르케스가 진정 위대한 작가로 문학사에 남은 것은 ‘사실’을 이성의 눈에서 벗어나 라틴 아메리카의 일상에 존재하는 심리적·환상적·내면적 측면까지 포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대부분의 작가들이 배재해 온 인간이 심리적으로 인지하는 측면, 물리적 실존체에 투영 된 자신 내부의 관념까지 하나로 통합해 소설 속에 그려낸 것이다. 무엇이 진정한 리얼리즘인가, 라는 질문을 독자의 마음속에 남기며.

김규민 기자 memyself_i@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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