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처음 가 봤는데도 ‘이 곳, 언젠가 와 봤던 것 같아’라는 느낌이 드는 장소가 있다. 또는 ‘지금 이 상황, 꿈에서 나왔던 장면이야!’라고 느낀 적이 있을 것이다. 바로 ‘데자뷰’다. 데자뷰를 플라톤은 ‘과거 기억의 상기’라는 개념으로 설명했고 데카르트는 인간에게 자연적으로 내재된 ‘본유 관념’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를 프랑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은 ‘순수기억’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그리고 이 ‘기억’이란 개념이 바로 베르그송의 저서 『물질의 기억』의 주요 주제다.

현대 프랑스 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앙리 베르그송은 1859년 10월 18일 유대계 폴란드 출신 아버지와 영국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일곱 남매였던 베르그송의 가정은 그리 부유하지 않았지만, 베르그송은 중·고등학교 시절 수학과 작문 등 다양한 분야에서 우수한 기량을 보이며 고등사범학교에 3등으로 합격하게 된다. 그리고 고등사범학교 입학 후 읽은 라슐리에의 『귀납의 기초에 관하여』는 그를 철학자의 길로 걷게 했다. 이후 베르그송은 그의 철학이론의 기본이 된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아래 『시론』)』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물질과 기억』을 출판한다. 이어 1900년 그는 프랑스의 고등교육기관 콜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가 되고 희극에 초점을 맞춘 예술철학서 『웃음』 그리고 『창조적 진화』를 출판하며 1927년 노벨문학상을 받는다. 이처럼 철학자로서의 활발한 활동을 하던 그는 1932년 도덕과 종교의 기원을 통해 인간본성을 고찰하고 인류의 미래를 성찰한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을 출판한 뒤 1941년 폐렴으로 사망한다.

베르그송의 저서 중 『물질과 기억』은 특히 그의 철학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물질과 기억, 시간의 지층을 탐험하는 이미지와 기억의 미학』의 저자 한림대학교 인문한국학과 황수영 교수는 “『물질과 기억』은 『시론』에서 전개한 연속적 질적 변화인 ‘지속’의 개념을 ‘기억’ 이론 중심으로 발전시켰으며, 이어 『창조적 진화』에서는 지속, 기억에 바탕을 둔 ‘진화’의 개념이 새로 등장한다”며 “지속, 기억, 진화는 베르그송 철학의 세 가지 주요 주제들”이라고 설명했다.

베르그송은 연속적인 변화(『시론』에서의 ‘지속’)를 순간적으로 파악한 것을 ‘이미지’라고 불렀다. 또한 그 이미지들을 뇌라는 또 다른 이미지를 통해 포착해 형성한 것을 ‘지각’이라고 불렀다. 이런 지각에 의해 구성된 것이 바로 ‘기억’이다. 베르그송은 기억이 신체와 정신에 동시에 작용하여 결과적으로 그 둘을 연결 짓는 매개가 된다고 생각했다. 베르그송은 이 기억을 운동능력이나 언어능력과 같이 반복된 신체 활동을 통해 습득된 습관기억과 어떠한 노력 없이 떠올려지는 이미지기억의 둘로 나눴다. 습관기억은 어떠한 삶의 유용성을 목표로 구성되는 데 반해 이미지기억은 유용성과는 관계없이 무의식적으로 작용한다는 차이가 있다.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널리 알려진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바로 이런 이미지기억과 깊은 관련이 있다. 앞에서 언급한 데자뷰 현상 또한 이런 이미지기억이 잠재적으로 존재하는 상태인 순수기억의 작용인 것이다.

『물질과 기억』은 그 연구 방법에 있어서도 가치를 인정받는다. 베르그송이 활동하던 19세기는 과학주의가 널리 퍼져 있어 철학자들이 자신들의 이론을 무조건 과학적으로 설명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베르그송은 실어증과 같은 여러 병리적 현상을 바탕으로 한 과학적 연구를 함과 동시에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는 인간의 직관을 통한 전체적인 사고를 강조하는 형이상학적 태도를 보였다. 황 교수는 “과학주의자들은 이미지기억이 뇌에 보존된다고 주장하지만 베르그송 철학에서의 이미지기억은 뇌에 보존되지 않고 정신의 본성을 이룬다”며 “정신은 물질적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베르그송은 일종의 유심론, 정신주의적 입장을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

충남대학교 철학과 송영진 교수는 그의 저서 『베르그송의 생명과 정신의 형이상학』에서 ‘인구폭발과 과학기술 문명의 발달로 생태계와 환경이 파괴돼 인류의 생존이 위협을 받는 현대사회에서 생물계에 대한 현상학적 이해와 서구 철학에서 기원하는 과학의 본질에 대한 이해를 기초로 하는 베르그송의 철학은 인류의 생존 문제나 정신적·윤리적 문제에 좋은 해답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베르그송의 학문적 진리 추구를 향한 열정과 그의 과학과 형이상학을 아우르는 연구 방법은 현대사회를 사는 우리들에게도 많은 것을 시사한다. 베르그송의 탄생 150주년을 기념하며 그가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강의를 마칠 때 항상 했던 한 마디로 글을 마쳐본다.

‘여러분, 5시입니다. 강의는 끝났습니다.’

문해인 기자 fade_away@yonsei.ac.kr

그림 김진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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