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사진 『원주캠 30년사 교사편찬사』

1885년 설립된 광혜원에서 출발한 세브란스와 조선기독교대학을 모태로 하는 연희전문학교는 1967년부터 ㅎ ‘연세대학교’라는 이름으로 역사를 쓰기 시작했다. 오는 2010년에는 송도캠이 부분 개교함으로써 우리대학교의 새로운 역사가 열린다. 이제 연세대학교라는 이름 아래 존재하는 3개의 캠퍼스 중 원주캠 학생들도 모르는 원주캠의 시초에 대해 알아보자.

지난 1970년대 서울소재의 많은 대학들은 문교부의 정책에 의해 지방분교를 세우게 된다. △서울소재대학 입학정원동결 △고등교육 수요 증가 △사립대학의 재정난 해소 등을 지방분교 설립의 이점으로 든 이 정책에서 우리대학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학교 측에서는 지방분교 후보지로 경상남도 창원, 경기도 오산, 대전 대덕단지 중 한 곳을 생각했다. 그러나 지방분교설립위원회에서 창원, 오산의 위치적 특성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대덕단지에 분교를 세우려고 했다. 그때 지난 1976년에 우리대학교 재단으로 편입된 원주기독병원이 강원도 원주에 의과대학 분교 설립을 제안했다. 결국 학교 측은 1977년 문교부로부터 의과대 원주분교 설립인가를 받는다. 그러나 이때 생긴 원주분교가 우리대학교에서 처음으로 만든 분교는 아니다. 1964년 우리대학교는 부산에 가정대학을 만든 후 2년 뒤 이를 서울 본교로 이전한 바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존재하지 않지만 이때 만든 가정대학이 우리대학교 최초의 분교인 셈이다.

한편 지난 1978년 처음으로 학생을 모집한 의과대학 원주분교는 위치만 원주에 있을 뿐 신촌캠 의과대 소속이었다. 이후 원주분교는 보건학과 신설에 이어 1980년 △영문  △경영 △수학 △생물학 등 7개 학과가 생기면서 ‘원주대학’이라는 하나의 단과대로 승격된다. 학교 측은 1982년부터 원성군 매지리(현재 원주시 흥업면 매지리)의 약 57만평 땅에 120억원을 투자해 아시아에서 으뜸가는 전원대학으로 키우기 위한 ‘매지캠퍼스(아래 매지캠)’를 구축하기로 한다. 당시 안세희 전 총장은 매지캠을 신촌캠 수준의 종합대학으로 성장시키려고 했다. 입학하는 신입생들 역시 신촌캠과 입학성적 차이가 거의 나지 않았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이 지난 1981년 졸업정원제*를 실시했고 이로 인해 1982년부터 마스터플랜을 가지고 3차년도로 나눠 조성하려던 매지캠에 자금이 끊기는 일이 발생했다. 졸업정원제로 인해 신촌캠에 학생 정원이 2.5배 늘어나게 되자 본래 매지캠에 투자되기로 한 자금이 갑자기 공간이 부족하게 된 신촌캠으로 투자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결국 매지캠은 초기투자비용이 대부분 사라지게 됐고 초창기에 발전할 기회를 결정적으로 잃었다.

이후 지난 1987년에 △원주부총장직제 신설 △원주캠 1대 총학생회장 선출 △학생회관 완공 등으로 매지캠과 원주의과대학이 위치한 일산캠을 아우르는 ‘원주캠’의 기본적인 면모가 갖춰지게 됐다.

원주캠의 역사를 제대로 된 모습으로 세우기 위해 학교, 학생 모두 고심했다. 지난 1992년 원주캠 학생들은 원주캠의 발전을 위해 23개의 요구안을 제시했고 ‘신촌상경투쟁’을 감행했다. 이 결과 학교 측으로부터 도서관과 사회관(현재 정의관)을 얻어냈다. 1996년부터 원주캠은 신촌캠과 별도로 특성화, 세계화에 대한 발전을 모색 하며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했다. 그 결과 원주캠은 2001년 국내 최초로 환경경영체제인증을 받아 환경친화적 캠퍼스라는 이름을 얻게된다. 또한 2007년에는 국내 대학 최초로 레지덴션 칼리지를 도입했다.

원주캠 30년 교사편찬 위원 오영교 교수(인예대·한국근대사)는 “원주캠의 30년은 성장의 고통이 있는 단계였다”며 “이제 하나의 매듭을 짖고 또다른 30년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문교부의 정책과 맞물려 설립된 원주캠퍼스. 그 시작은 미약했으나 명실상부한 제2의 캠퍼스로서 발전해야 할 것이다.

*입학시 학생 선별을 하지 않고 졸업시에만 학생정원을 설정하는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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