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문제에 관심 갖기 시작한 패션계의 양심선언

"I'm not a plastic bag(나는 비닐봉지가 아니에요)". 지난 2007년 디자이너 아냐 힌드마치가 선보인 천가방에 새겨진 환경보호 문구다. 이 가방이 시장에서 뜨거운 반응을 얻으면서 유명 브랜드들이 앞 다투어 이와 같은 ‘에코백’을 내놓았다.

에코백으로 부각된 패션업계의 사회의식은 곧 그 시선을 사회 전반으로 넓혔다. 세계 각지의 의류업 종사자들이 분해가능한 원단, 공정무역*방식의 의류제작, 전통직조기술의 보존 등에 신경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일찍이 패션의 사회적 책임이 부각된 유럽에서는 이런 흐름을 ‘윤리적 패션(ethical fashion)’이라고 일컫는다.

세계 패션시장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런던패션위크에는 ‘에스테티카(esthetica)’라는 부스가 따로 있다. 에스테티카는 미학(estethic)과 윤리(ethic)의 조합어로 패션과 윤리를 결합한 옷을 전시하는 공간이다. 최근 3년 사이 참가 디자이너가 13명에서 200명으로 늘어날 정도로 급속히 성장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윤리적 패션은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시중에 ‘오가닉’, ‘그린’ 등의 수식어가 붙은 상품이 계속해서 출시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패션의 사회적 책임이 환경 분야에만 머물렀고, 디자이너들의 활동이 큰 움직임으로 집약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윤리적 패션을 본격적으로 소개하는 전시가 열렸다. 오는 10월 4일까지 경기도 미술관에서 진행되는 ‘패션의 윤리학-착하게 입자’(아래 착하게 입자)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황록주 학예연구사는 “디자이너들의 개별적인 활동을 함께 묶고, 이것이 소비자의 선택에 작게나마 영향을 미치는 기회를 만들려고 한다”며 기획의도를 설명했다.

이경재 디자이너가 옥수수성분의 원단으로 만든 웨딩드레스. 땅 속에서 5주 안에 분해된다.

착하게 입자에 참여한 작가들이 윤리적 패션을 위해 개척한 길은 각양각색이다. 이경재 디자이너가 옥수수성분의 원단으로 만든 웨딩드레스는 땅 속에서 5주 안에 분해된다. 자연성분임에도 백색 광택과 부드러운 촉감을 살렸다. 마크 리우는 낭비되는 천이 없게 재단해 시상식에서나 볼법한 검은 이브닝드레스를 만들었다.

윤리적 패션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는 공정무역패션이다. 거대의류기업이 제3세계 여성과 아동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있는 현실에 반기를 든 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 착하게 입자의 참여작가 파울라 프라이타스는 브라질 여성공동체의 손을 빌려 알루미늄 캔뚜껑을 실로 엮은 수공예가방을 만들었다. 이 제품은 프랑스에서 인기리에 판매되며 상업적 성공까지 거두는 한편 브라질 여성의 경제적 자립에도 일조했다.

알루미늄 캔뚜껑을 재활용해 만든 파울라 프라이타스의 작품

우리나라에도 전문적으로 공정무역 옷을 취급하는 브랜드들이 점차 생겨나고 있다. 이번 전시에 참여하기도 한 ‘그루(g:ru)’는 우리나라 최초의 공정무역패션브랜드다.

그루는 전 세계 농약의 25%가 면화농장에 뿌려진다는 점에 문제의식을 갖고 농약을 일절 사용하지 않는다. 또한 착취당하는 네팔, 라오스 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국제기구에서 보장하는 정당임금을 지불하고 있다. 그루 이수현 마케팅 팀장은 “최근 공정무역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지인 중심이었던 고객층이 점차 확대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직 패션의 사회적 책임에 문제의식을 가진 소비자들은 적다. 고애란 교수(생과대ㆍ의상사회심리학)는 “정부, 민간단체, 연예인의 홍보 등을 통해 소비자의 관심을 증폭시켜 윤리적 패션시장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처음 유기농음식이 나왔을 때도 소비자의 반응은 썰렁했지만, 활발한 홍보로 지금은 하나의 트렌드가 됐다. 이젠 옷의 차례다.

*공정무역: 제3세계의 생산자들에게 노동의 대가를 공정하게 지불함으로써 경제적 자립 돕고 일자리를 제공하는 무역방식.

양준영 기자 stellar@yonsei.ac.kr

사진 정석현 기자 remijung@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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