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년 전 해금으로 되살아난 월북예술인들의 자취를 좇다… 단절된 역사 복원하려면 자료 부족과 관심 저하 극복해야

박태원, 백석, 임화, 정지용…. 고등학교 문학수업 시간에 졸지만 않았다면 교과서에 감초처럼 등장하는 이 이름들이 낯설게 느껴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불과 20년 전까지만 해도 그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일반인은 알 수도 없고 알아서도 안 되는 이름들이었다.

이유는 단순하다. 이들은 독립 후 해방공간*에서 남쪽이 아닌 북쪽을 택했기 때문이다. ‘월북예술인’이라는 낙인이 찍힌 것이다. 이념과 체제의 대립이 극에 달한 전후 한국 사회에서 이들은 ‘존재가 부인당한’ 존재였다. 월북예술인에 대한 공개적인 언급은 금기였다.

간혹 문헌에 언급되더라도 그들의 이름은 알아볼 수 없도록 ‘박××’같은 식으로 지워져 있었다. 지난 1988년 7월에 이르러서야 월북예술인에 대한 대대적인 해금 조치가 내려졌다. 남북의 긴장관계가 진전과 후퇴를 거듭한 끝에 겨우 맺은 결실이었다.

타입캡슐에서 월북예술인 꺼내기

『월북 예술가 오래 잊혀진 그들』의 저자 광운대 동북아대학 조영복 교수는 “해금은 그동안 비공개로 진행됐던 월북예술인에 대한 연구가 공개적으로 이뤄질 수 있는 여건을 갖춘 것”이라고 말했다. 해금 이후 문학, 미술, 음악 등 각 분야에서는 월북예술인의 생애와 작품세계를 본격적으로 복구하려는 시도가 이어졌다. 그들에 대해 재평가를 내리고 긍정적인 인식을 확산하는 작업은 제법 성공을 거뒀다. 월북 작가들의 시집이 복간됐고 미술관에도 월북 화가들이 작품이 걸렸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1989년, 테너 이동원과 가수 박인수가 정지용의 「향수」를 노래로 불렀을 때 반향은 대단했다.

그러나 아직 그들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는 좀처럼 진척되지 못한 상태다. 가장 큰 이유는 남아있는 절대적인 자료의 양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월북 이후의 행적은 확인할 방법도 마땅히 없다. 때문에 많은 이들이 사망연대조차 분명치 않다. 우리에게 주어진 자료는 월북 전 그들이 남긴 작품들, 탈북망명자들의 증언, 북한의 언론보도 등 부분적인 것들뿐이다.

또 다른 이유는 월북예술인에 대한 관심이 멀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조 교수는 “자료는 과거에 비하면 상당히 많이 개방된 상태”라며 “오히려 해금 전후 무렵에 비해 연구자들의 열정이 많이 약해진 것 같다”고 말했다.

북한에서 남녘출신 예술가로 사는 것

50년대 초까지만 해도 월북예술인들은 북한 사회에 성공적으로 정착하는 듯 보였다. 많은 이들이 공산당의 요직에 앉았고 문화, 예술, 교육 분야에서 활약했다. 그러나 50년대 중반을 지나며 김일성 일인지도체계가 완성되는 과정에서 남로당, 소련파, 연안파 등이 차례차례 숙청당하기 시작했다.

주로 남로당에 속해있던 월북예술인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들의 예술은 정치적 도구로 이용되다가도 방해가 되자 쉽게 숙청의 꼬투리가 됐다. 많은 월북예술인들이 서정적이고 낭만주의적인 예술성향 때문에 ‘부르주아적’이라는 오명을 쓰고 창작활동을 제한받았다. 체제에 대한 충성심이 항상 그들의 예술을 보장한 것도 아니었다. 열렬한 사회주의자였던 소설가 한설야조차 숙청당해 펜이 꺾였고, 이념적으로 그리 투철하지 않았던 소설가 박태원은 임종 직전까지도 창작에 전념할 수 있었다.

시인 백석은 평안북도 정주가 고향이다. 그는 그의 고향을 지키고 있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역시 월북예술인으로 분류돼 한국 문학계에서 그의 자취는 말소됐다. 북한에서도 그는 부르주아적이라는 비판을 받고 지방의 협동농장으로 추방당한다. 갈매나무를 생각하던 시인은 그렇게 농사를 지으며 여생을 보냈다.

화가 이쾌대는 「군상」시리즈 등에서 서구적인 화법으로 동양적 감성을 그려내 ‘한국의 미켈란젤로’로 불렸다. 그는 좌익도 우익도 아니었다. 다만 6.25전쟁 도중 유엔군의 포로가 됐을 때 그는 송환지로 북한을 택했다. 월북 이후 그는 정치적 논란에 휩쓸리지 않고 조용히 그림을 그리며 살다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한국 최초의 현대음악 작곡가로 알려진 김순남은 외출하듯 훌쩍 월북했다. 그는 금방 북한 음악계의 주도적인 인물로 자리 잡았다. 1952년에는 모스크바 차이코프스키음악원으로 유학을 가 그가 존경하던 작곡가 아람 하차투리안에게 가르침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 역시 남로당 출신 예술인들이 피할 수 없었던 부르주아적이라는 맹렬한 비판을 받았다. 결국 조선소로 추방당한 천재 음악가는 폐병으로 고생하다 쓸쓸한 최후를 맞았다.

누가 그들을 잊혀지게 만들었나

‘월북’은 어쩐지 정치적인 냄새를 풍기는 단어다. 하지만 많은 월북예술인들은 그저 고향이라는 이유, 사회주의에 대한 막연한 호감, 혹은 우연한 동기로 북한을 택했다. 게다가 자발적으로 월북한 사람은 물론, 납북된 사람이나 원래 북녘에 살고 있던 사람들까지도 모두 월북예술인이라는 말로 뭉뚱그려졌다. 그들을 금기의 존재로 규정한 사람들은 무엇을 두려워했던 것일까? 결과적으로 그들의 재능에 잠재돼 있던 무한한 예술세계는 공허한 이념대립에 의해 의미 없이 희생됐다.

월북예술인들의 이름이 지워졌던 시절에 사람들은 오히려 그 때문에 호기심을 느꼈다. 하지만 이름이 드러난 지금 우리는 그들에게 얼마나 관심을 갖고 있는가? 우리가 그들에 대해 아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잘 아는 것도 아니다. 월북예술인들의 단절된 역사가 충분히 복원됐다고 생각한다면 때 이른 착각이다. 그들의 작품을 그저 수많은 10점짜리 언어영역 지문 가운데 하나쯤으로만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지? 만일 그렇다면, 비록 해금은 됐지만 월북예술인들은 여전히 잊혀진 존재로 남아있는 셈이다.

*해방공간 : 해방과 남·북한의 독립정부 수립 사이의 시기(1945~1948)

아직 월북예술인의 많은 부분이 이념의 가림막 뒤에 감춰져 있다. 인공기 뒤의 그림은 이쾌대의 작품 ‘두루마기 입은 자화상’

김서홍 기자 leh@yonsei.ac.kr

 일러스트레이션 박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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