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 서클의 변화


이한열 열사와 과 동기였던 소설가 김영하 동문(경영·86)의 『빛의 제국』에서는, 남파간첩인 주인공 김기영이 연세대 수학과 86학번으로 입학한다. 학생운동 세력에 잠입해 활동하며 주체사상을 전파하라는 지령 때문이었다. 소설 속에서 학생운동 세력은 소위 ‘이념 서클’을 중심으로 활동한다. 서클의 주요 활동은 사회과학서적을 읽고 시위를 주도하면서 후배를 이념적으로 교육하는 것이다. 이런 서클 중심 학생운동의 모습은 386세대 운동권의 전형처럼 읽힌다.

세월이 흘러 대학가 학생운동의 모습은 많이 변했다. 이념 서클의 존재감은 희미해졌고 학생회를 둘러싼 논쟁만 남았다. ‘서클’을 대체하는 신조어였던 ‘동아리’는 대학사회에 완전히 정착했다. ‘주사파’는 원뜻을 거의 잃고 주 4일 학교에 나오는 학생들을 일컫는 말로만 쓰인다. 동아리 연합회 회장 최환이(신학·08)씨는 “지금도 이념적으로 활동하는 동아리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과거에 비해 분위기가 많이 사그라진 건 사실”이라며 “실용주의적인 시대적 조류 때문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독재정권시절의 학생운동은 시대적 사명으로서 모든 단과대를 아우르는 학생들의 지지를 받았다. 지난 1975년의 ‘연세대 4·3시위’가 대표적이다. 1975년 4월 3일은 ‘민청학련 사건’ 이후 1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당시 우리대학교 박대선 총장은 석방된 교수 및 학생들의 복직·복교를 추진했으나 문교부의 압력에 밀려 사임했다. 이에 반발한 학생들은 개교 이래 최대 규모의 시위를 벌였고, 유신 정부는 긴급조치 9호로 대응했다. 2개월의 휴교령이 내려졌고 학내 모든 서클은 해체 혹은 활동 정지됐다. 학생운동의 뿌리가 학내 서클이었기 때문이다.

‘민족문화연구회(민연)’, ‘인간걱정반’, ‘목하회’ 등이 주요 통제대상이었다. 특히 연세대 학생운동을 주도한 세력은 지난 1963년 창립된 ‘한국문제연구회(한연회)’의 맥을 이은 ‘민족문화연구회(민연)’였다. 민연은 1980년에야 ‘민족문제연구회’로 재조직된다. 70년대 창립된 중앙동아리 ‘목하회’는 지금도 같은 이름으로 학생회관 3층에 남았다. 그러나 2005년도 목하회 회장을 맡았던 이웅찬(경제·04)씨는 “사실 2004년도 이후로는 전혀 운동권이라 볼 수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동아리 차원에서 데모에 참가하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올해 ‘목하회’는 학벌주의 등을 테마로 매주 목요일 독서 세미나를 진행했다. 이씨는 “(세미나 내용이) 진보적이라 할 내용이긴 하지만 행동보다는 학술적 성격이 강하다”고 말했다.

이런 변화는 9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일어났다. 그 사이에는 ‘96연세대사태’가 있다. 한총련 행사인 8·15 대축전을 위해 연세대에 집합한 학생들이 전경들과 대치해 무력충돌이 발생했던 사건이다. 96연세대사태는 대중들이 학생운동을 외면하게 하는 원인이 됐다. 가뜩이나 학생운동이 수그러들던 90년대였다. 과거와 달리 정권의 폭압이 드러나지 않는 상황에서 학회·동아리가 무엇을 중시해야 할지에 관한 논쟁이 일었다. 대학가의 분위기가 바뀌면서 동아리 활동 자체가 위축된 것도 원인이 됐다.

그러나 외부의 시선은 조금 다르다. 목하회 회원 김나은(외문·08)씨는 “대학 들어오면 운동을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었다”며 “목하회를 보고 운동권 동아리라고 생각해서 들어오게 됐다”고 말했다. ‘길들여진 세상에 거칠게 질문하며 걷기’라는 기조가 다분히 ‘운동권적’으로 보였다는 얘기다. 사실 운동권이라는 이미지는 자의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정권의 무력에 대항한다는 목표가 뚜렷했던 과거와 달리, 지금 ‘운동권’이 되려면 현 상황에 대한 스스로의 판단이 필수적이다.

목하회 전 회장 이웅찬씨는 목하회의 활동목표를 “민주적 시민의식을 갖추는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시민의 정의에 대해서는 “민주주의를 자각하면서 부조리한 일이 있을 때 분연히 떨쳐 일어나는, 주변을 배려하고 베풀 수 있는 주도적 시민”이란 답이 돌아왔다. 그렇다면 그것이 곧 ‘실천’이 아니겠느냐 묻자, 이씨는 “그렇게 볼 수 있다면 좋겠다”며 “장기적인 실천을 준비한다는 정도로 보면 될까”하고 웃었다.

조직의 성격을 잃은 과거의 이념 서클은 사회를 고민하는 개인들을 품는 장소로 변해 있었다. 그들 중 일부는 목하회에서 쌓은 자신들의 생각을 바탕으로 정당이나 학생회 같은 보다 정치적인 집단을 찾아가 활동할 수 있을 것이다. 동아리의 활동 영역은 축소됐지만, 그것이 꼭 동아리 역할의 축소는 아닌지도 모른다.

백지원 기자 kaleidoscope@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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