괭이부리마을은 어디선가 떠밀려 온 사람들의 마을이 되었다. 오게 된 까닭은 모두 달랐지만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라는 공통점 때문에 동네 사람들은 서로 형제처럼 지냈다.
- 소설 『괭이부리말 아이들』중에서

지하철로 한참을 달려 도착한 인천역은 이상하리만큼 조용했고 한차례 비를 퍼붓고 남은 먹구름들로 가득한 인천의 하늘은 우울한 분위기를 풍겼다. 소설 『괭이부리말 아이들』의 배경인 인천시 괭이부리마을을 찾아 당당히 발걸음을 내딛던 낯선 방문객의 발걸음은 점점 늘어져 갔다.

소설 『괭이부리말 아이들』의 김중미 작가는 이곳에서 공부방을 운영하면서 괭이부리마을 아이들의 이야기를 연민과 사랑으로 풀어냈다. 김 작가의 펜 끝에는 괭이부리마을 사람들의 일상과 함께 아이들의 꿈과 작가의 체험이 조용히 묻어난다. 화려하게 발전하는 현실의 그늘에는 항상 소외받는 사람들이 있다. 김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그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고 다시 한 번 보듬어주었고 희망을 선물했다.

괭이부리마을과 얼굴을 마주하며

괭이부리마을을 향해 걷는데 길 오른편으로 철길이 따라붙는다. 소설에서 숙자와 아버지가 함께 걸었던 기찻길인 듯하다. 집 나간 아내를 생각하며 힘들어 하는 아버지를 위로하며 우리끼리라도 잘 살면 좋겠다고 말하는 숙자의 모습이 철길 위에 그려진다. 머리 위를 지나는 고가도로에선 화물차들이 시끄럽게 경적을 울려댔지만 저 길이 숙자네 아버지가 완성되길 바라던 고향 가는 길이라 생각하니 오히려 기분 좋게 걸을 수 있었다.

괭이부리마을에 들어가기에 앞서 만석교회가 올려다 보이는 담길을 걸었다. 허름한 괭이부리마을의 풍경과 대조적으로 교회는 웅장함을 뽐냈다. 적어도 이 소설에서 교회는 이들의 마음을 구원해주지 못했다. 철탑 위의 십자가는 충혈된 눈동자처럼 붉은 빛을 띠고 밤새 괭이부리마을을 바라보기만 했을 뿐이다. 지금 이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공사장을 지나치는데 무슨 소리가 들렸다. 술에 취한 사람들 소리 같기도 하고 아이들 소리 같기도 했다. 영호는 조금 망설이다가 공사장으로 들어갔다. 거기엔 고등학생쯤 되는 남자 아이 둘이 나란히 누워서 뭐라고 중얼대고 있었고, 옆에는 비닐 봉투가 버려져 있었다. 아이들은 본드에 취해 눈도 제대로 뜨지 못했다.

교회 앞까지 이어져 있는 담벼락에는 버려진 건축자재들과 함께 본드에 취해 쓰러져 있는 동수와 명환이의 모습이 보인다. 부모님으로부터 버림받은 명환이와 부모님이 집을 나간 동수, 이들은 힘든 현실을 잊는 방법으로 본드를 선택했다. 꿈속에서 만큼은 가족들과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자신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리라.

영호는 이런 아이들에게 새로운 가족이 돼주었고 진정한 행복을 찾아 주었다. 같이 살 수 있는 집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경찰에 붙잡힌 동수를 위해 어머님이 남기신 적금까지 깨면서 변호사를 선임했다. 왕따를 당하던 명환이를 위해 요리 학원까지 알아봐 주었다. 영호를 보면서 그들은 진정한 부모의 사랑을 느끼지 않았을까?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새로운 가족을 갖게 된 영호의 마음일 것이다.

 걷히지 않는 과거라는 안개

“내가 중학교 때 제일 싫어한 말이 뭔지 아니? ‘너도 괭이부리말 사니?’ 였어. 너도 생각나지? 우리 5학년 때 선생님이 우리 학교 아이들처럼 머리 나쁘고 지지리 가난한 아이들은 처음이라구 한거. 그게 사실이야. 달라진 건 하나도 없어.”

거미줄처럼 얽힌 마을 골목에 들어서니 1950년대 판자집들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 유리대신 종이와 비닐로 막은 창문들, 삭을 대로 삭은 스레트 지붕들은 예전부터 사람이 살지 않은 마을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때마침 저쪽에서 미닫이문을 열고 나오시는 할머니 한 분과 몇 번을 덧댄 집 기둥들이 아니었다면 버려진 마을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바로 옆에 우뚝 솟아 있는 ‘만석○○아파트’의 모습과는 너무 다른 풍경이다.

 

인천시 만속동 괭이부리마을 옆에 위치한 포구. 이곳은 괭이부리마을 사람들의 또 다른 삶의 터전이었다.

 

괭이부리마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인천이 개항하고 난 뒤부터다. 개항 뒤 밀려든 외국인들에게 일터를 빼앗긴 사람들이 괭이부리마을로 와 갯벌을 메우고 살기 시작했다. 일제 강점기에는 항구 가까운 이곳 만석동에 공장들이 많이 들어섰고, 그러자 가난한 노동자들이 괭이부리말로 꾸역꾸역 모여들었다. 6?25 전쟁 후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올라온 돈 없는 이농민들 역시 괭이부리마을 같은 빈민지역에 둥지를 틀었다.

둘이 걷기도 어려운 골목길에는 가스통이 놓여 있고, 지붕과 지붕 사이로 작게나마 보이는 하늘에는 전선들이 얽히고 설켜있다. 골목 사진을 찍는데 한 할머니께서 “사진 찍어 가 봐야 뭐한디냐” 라고 말을 던지신다. 할머니는 기자들이 매번 사진을 찍어 가는데도 마을이 바뀌는 것은 하나 없다며 한숨을 쉬었다.

실제 괭이부리마을은 소설 『괭이부리말 아이들』이 출판 된 이후 잠시 개발의 조짐을 보였다. 하지만 개발의 소식은 이어지지 않았다. 부두 근처의 공장들과 부두만 개선됐을 뿐이다. 괭이부리마을은 지금 과거의 섬처럼 우리 곁에 남았다.

 

 

가난할 수 없는 사랑

촛불이 하나씩 켜질 때마다 영호도, 명환이도, 숙자 어머니도, 동준이도 모두 한 해 동안 겪은 가슴 아픈 일이 되살아나 울음을 삼켜야 했다. 그러나 그 아픈 기억 속에는 아픔과 슬픔을 함께 나눈 사람들이 있었다.

골목길을 걷다 보니 숙자네 집과 꼭 닮은 작은 사다리가 있는 2층 판잣집이 보였다. 닳아서 페인트가 벗겨진 미닫이문의 문지방은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을 말해줬다. 판잣집 안에서는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도시에서는 들을 수 없었던 이웃들 간의 행복한 정의 웃음소리가.

마을 밖으로 발걸음을 돌리다가 방문한 물 빠진 포구에는 꼬마아이 두 명이 뛰어다니며 놀고 있었다. 아버지가 배를 정리하시는데 따라 온 것 같았다. 걱정하나 없어 보이는 해맑은 얼굴의 아이들에게선 괭이부리마을의 힘든 과거도, 가난의 그늘도 찾아볼 수 없었다.

부두 저편으로 달려가는 아이들 뒤편으로 바다가 눈에 들어왔다. 때마침 밀려들어오는 밀물은 울퉁불퉁하고 상처투성이인 바다의 표면을 잔잔하게 감싸주었다. 괭이부리마을 사람들이 서로의 다친 마음을 따스하게 안아준 것처럼.

박기범 기자 aks_walker@yonsei.ac.kr

사진 박선종 기자 ganzinam@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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