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는 죽었다.”

이 문장을 처음 접했을 때 사람들은 크게 두 가지로 반응 할 수 있다. 첫째, 어떤 작가가 죽었단 말인가? 둘째, 이 시대에 진정한 작가는 없단 말인가? 그러나 이 문장은 특정 작가의 죽음도, ‘진정한 작가’의 부재를 의미하지도 않는다. 여기서 ‘작가의 죽음’이란 작가라는 개념 자체의 죽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작가를 죽인 사람들은 누구일까?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문예 사조를 연 사람들이다.

표절을 정의할 수 있는 자 누구인가

1990년대 초, 우리나라 문단에서는 한 작품을 두고 격렬한 공방이 일어났다. 이인화씨의 소설『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가 표절시비에 휘말리게 된 것이다. 이 소설은 작품에서 선보인 새로운 형식으로 문단의  기대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평론가 이성욱씨는 “이 작품은 국내외 소설들에서 여러 부분을 발췌해 옮겨 놓은 표절”이라며 문제를 제기했다.

이 작가는 타 작품에서 발췌해온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이것은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의 한 기법인 혼성 모방이라고 반박했다. 평론가 김욱동씨 역시 “이 작가의 작품을 표절로 공격하는 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새로운 소설미학인 상호 텍스트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무지의 소치”라며 이 작가의 주장에 힘을 실어줬다.

작가가 먼저냐, 작품이 먼저냐

상호텍스트성은 일반적으로 명시적으로 주어진 텍스트 안에 다른 텍스트가 인용문이나 언급의 형태로 나타나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의 핵심 개념이다. 문학이론가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이를 가리켜  “모든 텍스트는 어디까지나 다른 텍스트를 흡수하고 변형시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표현했다. 즉, 모든 작가는 작가이기 이전에 다른 작품의 독자이기 때문에 기존 작품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 작품은 작가가 독창적으로 창조한 ‘폐쇄적’ 개념이 아니라 기존 텍스트들과 밀접한 연관성을 맺고 있는 ‘개방적’ 개념이다. 이에 따라 포스트모더니즘은 더 이상 작가의 전지전능함, 한 개인의 ‘독창성’을 인정하지 않는데 이른다.

허구와 실재 사이에 선긋기

질문
1.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마음에 드나요? 예(   ) 아니오(   )
2. 이후 전개되는 이야기가 지금까지의 이야기보다 더 감동적일까요?(   ) 아닐까요?(   )

소설을 읽다가 갑자기 이런 질문지가 등장한다면? 어떤 독자들은 불쾌해 할지도 모른다. 자신들이 몰입했던 소설 속 세계가 허구라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소설가들은 바로 이러한 효과를 노린다. 이것을 메타픽션, 즉 자기반영적 소설이라고 한다. 영문과 이광진 강사는 메타픽션에 대해 “글쓰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소설이 허구이자 창조물이라는 것을 보여준다”고 설명한다. 리얼리즘 시대의 소설가들이나 모더니즘 시대의 소설가들은 실제와 허구(소설)의 경계를 없애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메타픽션 형식의 포스트모더니즘 소설 속에서는 질문이나, 코멘터리, 철자바꾸기나 말장난 등을 통해 끊임없이 소설이 허구임을 상기시킨다. 그렇다면 작가들은 왜 소설이 허구임을 강조하려하는 것일까? 이는 시대 상황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1960~70년대 에는 TV뉴스나 사진기, 영화 등 소설보다 현실을 더 정확하게 반영할 수 있는 수단들이 등장했다. 따라서 소설은 스스로의 존립근거를 찾아야 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작가들은 소설 자체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작가들은 ‘소설’이라는 매체 안에서 다시 자기 스스로 ‘소설’이라는 점을 확인하면서 ‘소설’과 작가에 대해 이야기 하게 된다.

저자는 죽었는가?

포스트모더니즘 문예사조가 등장하기 전, 작가는 신과 같이 전지전능한 입장에서 작품을 ‘창조’하는 존재로 인식됐다. 그러나 상호텍스트성이라는 개념이 대두되면서 작품은 작가와 대등한 위치에 서게 됐다. 더불어 메타픽션 방식을 사용하면서 작품 내부적 실재에 귀를 기울이게 됐다. 즉,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는 신의 지위에서 추락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저자의 죽음’이라는 개념이 핵심적 논의로 자리 잡게 된다.  

“만일 내가 아직 한번도 사용된 적이 없으며 반복된 적도 없는 낯선 말, 선조가 사용하여 아직 진부해지지 않은 말을 사용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2천년전 한 이집트인은 파피루스에 이러한 고백을 남겼다. 남들이 한 번도 시도하지 않았던 것에 대한 열망은 종이가 탄생하기 전부터 존재했던 것이다. 지적 자산이 곧 물적 자산이 되는 현대에는 원본의 ‘독창성’이라는 개념이 자연적으로 당연시 된다. 대법원 역시 창작성이 “단지 어떠한 작품이 작자 자신의 독자적인 사상 또는 감정의 표현을 담고 있음을 의미한다”며 소송에서 판단 기준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과연 독창성, 나아가 ‘창작’ 행위라는 것은 존재할 수 있을까? 예(   ) 아니오(   )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이 남긴 질문이다.

김규민 기자 memyself@yonsei.ac.kr

그림 박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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