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나르 베르베르라는 프랑스 작가는 자신의 소설 『타나토노트』에서 등장 인물 막심 빌랭의 입을 빌려 말했다. “나의 꿈은 사람들을 더 멀리 꿈꾸게 하는 글을 쓰는 것이다.” 그는 그 말을 반증이라도 하듯 항상 무언가 새로운 글을 보여주려 애쓰며, 엄밀히 말하면 그는 같은 종류의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개미]는 생태학적 SF로,『타나토노트』는 오컬트적 SF로,『뇌』는 과학추리소설로 분류될 수 있다. 그렇지만 적어도 우리 사회에서 그의 글은 단 한 종류로 분류된다. 바로 장르소설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사회에서 장르소설이라는 것은 대체로 SF, 추리소설, 환상소설과 같이 ‘문학성이 희박’ 작품들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또한 소위 문단에 소속되지 않은 작가들의 작품 역시 대체로 장르소설으로 칭해진다. 이처럼 사실상 그 개념의 기준조차 모호한 장르소설은 우리나라의 문학 체계에서 확실한 푸대접을 받고 있는데, 문단 작가들은 물론 많은 일반인들 역시 장르소설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견해를 갖는다. 이렇듯 장르소설이 푸대접받는 가장 큰 이유는 우선 그것의 본질이 환상이라는 점에 있을 것이다.

환상의 사전적 의미는 ‘현실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을 머리 속으로 그려 생각하는 일’이다. 이 정의를 참고했을 때,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환상이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실이라는 용어가 지금이라는 시간적 조건과 이곳이라는 공간적 조건을 기반으로 한다는 것을 고려하면, 환상이 부정적인 의미만을 내포한다고 볼 수는 없다. 그것은 그 현실을 마주한 주체의 행동에 따라서 얼마든지 실현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부한 이야기지만 인간이 하늘을 난다는 것은 불과 300년 전만 해도 헛소리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렇듯 환상은 현실을 바꾸기 위한 가장 중요한 동기가 될 수 있다. 인간은 순전히 경제적인 존재는 아니기 때문에, 흔히 경제학적으로 말하는 인센티브는 인간을 움직이는 수많은 동인 중 하나일 뿐이다. 나는 오히려 환상, 더 포괄적인 의미로는 꿈이 인간을 움직이는 가장 중요한 동기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외부로부터 부여되는 동기가 아니며, 그렇기에 근대 이후의 자립적 인간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동기 유발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는 장르문학의 예로 알 수 있듯이 환상은 부정적으로 취급되고 있으며, 꿈은 압살당하고 있다. 이런 현실은 사회의 역동성과 다양성에 심각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

또 하나의 예를 들자면, 아이들에게 꿈이 무엇이냐고 물을 때 그들은 대개 의사, 축구선수, 연예인, 프로게이머, 대통령, 과학자, 교사 등등을 말한다. 물론 그 대답 자체로서는 잘못되거나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의 꿈은 신선한 상상력이 결여되어 있기에,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사회화된’ 꿈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과학적 진리를 묻는 질문이 아닌 가치 판단적인 질문에 대해 획일적 성격의 답만이 제시된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환상과 꿈을 평가 절하하는지, 더 나아가 우리 사회에 얼마나 다양성이 없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셰익스피어는 『햄릿』에서 이렇게 말했다. “호레이쇼, 이 땅과 이 하늘에는 자네의 철학으로 꿈꾸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이 존재한다네.” 그토록 높이 평가받는 셰익스피어의 문학은 사실 마녀와 요정이 살아 움직이는 환상과 꿈으로 점철된 문학이며, 그런 의미에서 그 말은 그 자신을 위한 변호이기도 하다. 어떤 면에서는 허구성이라는 문학의 본질에 가장 시원적으로 근접한 것이 장르소설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는 사회 내의 철학과 룰에 따르지 않으면 꿈꾸는 것조차 힘들며, 더군다나 그것을 지적하는 목소리는 심각하게 결핍되어 있다. 이런 현실의 대표적인 희생양이 바로 장르소설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환상 자체가 그야말로 환상으로 화석화된 사회가 아닐 수 없다.

박종주(인문학부·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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