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Fantasy). 환상곡. ‘형식에 구애됨이 없이 악상이 떠오르는 대로 자유로이 작곡한 작품’이라는 뜻. 지금부터 연주할 판타지는 고등학생으로 시작해 취업준비생으로 끝나는  ‘대학 판타지’다. 다소 격렬하게 공감할 수 있으니 주의하시길.

 

전주. 환상을 품다

푹푹 찌는 한여름 어느 고3 교실. 지겨워하는 학생들에게 선생님은 말한다. “얘들아 힘들지? 조금만 참아. 꿈과 희망과 낭만과 욕망이 가득한 대학생활이 너희를 기다리고 있다!” 손대면 톡 하고 터질 것만 같은 젊음을 딱딱한 의자에 저당 잡힌 대한민국의 고등학생들에게 대학이란 잘은 몰라도 ‘자유로울 것 같은’ 곳이다.

▲ 꿈과 희망과 낭만과 욕망의 대학생활이 얼마 남지 않았어…!
 

『반지의 제왕』의 저자 J.R.R.톨킨은 “판타지는 현실적 스트레스를 치유하는 희망”이라 말했다. 대한민국의 고등학생들은 치열한 입시경쟁을 겪으며 대학에 대한 판타지를 갖게 된다. 안양고에 재학 중인 김동일(18)군은 “대학교 MT가 정말 재밌을 것 같다”고 말했다. 대학 가서 가장 해보고 싶은 게 MT와 미팅이란다. 목포여고의 고3 여학생 송다희(19)양은 “대학생이 되면 여행도 다니고, 미팅도 많이 할 것”이라며 “열심히 공부해서 서울소재 대학을 꼭 가고 싶다”고 말했다. 지방에 거주하는 학생들은 특히 ‘서울에서의 대학생활’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다.

 도입. 아기다리고기다리던, 대학생활

3월. 개나리 꽃망울이 터짐과 동시에 꿈과 희망과 낭만과 욕망의 대학시절의 막이 올랐다. 고3교실의 무더위에 ‘쩔던’ 고등학생들은 상큼한 옷차림, 어색한 화장, 의욕에 넘치는 발걸음으로 두리번거리고 있는 붉은 볼의 신입생들이 됐다. 약속만 잘 잡으면 돈 한 푼 쓰지 않고 선배를 통해 모든 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 신입생들은 꽃처럼 밝은 얼굴을 하고 캠퍼스를 누빈다. 하지만 재수, 삼수를 해서 들어온 학생들은 또래보다 뒤쳐졌다는 조급한 마음을 갖기도 한다.

새내기 이미지(교육 · 09)씨는 3월은 원없이 놀기로 결심했다. 이씨는 “앞으로 노는 일정이 한 가득 잡혀있다”며 기대에 가득찬 목소리로 말한다. 그는 선배들의 ‘1학년 때 실컷 놀아두라’는 조언을 몸소 실천키로 했다. 그렇다고 ‘시간 관리’를 안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그는 “물론 공부도 열심히 해야죠”라고 덧붙인다.

조영민(컴퓨터정보공학부 · 09)씨는 음악을 좋아하는 새내기다. 그는 “심화된 공부와 밴드를 하고 싶지만 재수생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미래가 걱정된다”고 말한다. 재수 이상의 남자 새내기들은 군대 문제를 고민하는 경우가 잦다. 조씨는 “중앙 동아리는 시간을 많이 뺏기는 게 부담스러워 학과 밴드나 학회를 들고 공부에 많은 시간을 투자할 생각이다”라고 말했다.

전개-절정. ‘논스톱’이 판타지라는 사실을 깨닫다

오잉. 그런데 이게 왠일. 대학생활, 알고 보니 별거 없다. 내 낭만 돌리도…. ‘현실’에 일찍 눈 뜬 친구들은 말한다. “낭만이 밥 먹여 주냐. 결국 스펙 차곡차곡 쌓아서 취직 잘하면 그만이지” 문득 배신감이 든다. 선생님이 말씀하셨던 ‘꿈과 희망과 낭만과 욕망’은 존재하지도 않으면서 대학생활의 이미지를 미화시키고 대학에 가야하는 당위성을 설명하기 위한 허구일 뿐이었나.

▲ 허구는~허구일 뿐. 착각하지~말자!

평범치 않은 대학생들의 평범한 일상을 그린 TV시트콤『논스톱』은 이런 허구적 환상을 심어주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논스톱』에서 그려지는 대학은 그야말로 ‘지상낙원’이다. 여자 만나기를 공부하듯 하는 날라리 의대생(장근석), 평소엔 구리구리하지만 사랑하는 여자 앞에서는 한없이 사려깊은 남자친구(양동근), 가끔 유치하게 삐지기도 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훈훈함 때문에 모든게 용서되는 대학후배(조인성) 등 의 캐릭터는 많은 학생들에게 대학생활에 대한 로망을 품게 했다. 네이버 지식인에는 ‘정말 대학기숙사 생활은 논스톱처럼 훈훈하고 흥미진진한가요?’ 라고 묻는 질문들이 올라온다. 그리고 여기에는 대학생들이 분개하며 답변을 단다. 

윤상민(건축 · 07)씨는 3학년이 되면서 전공과목 숙제하느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는 “벌써 3학년이라니…믿겨지지 않는다”며 말문을 뗐다. 그는 일부 수업에 있어서 등록금이 아까울 정도로 대충하시는 교수님들 때문에 ‘대학에서는 학문하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 것’이란 환상이 깨졌다고 말했다.

대학의 존재 목적에 대한 회의감이 든다는 의견도 있다. 남지훈(기계 · 07)씨는 “원래 (대학에 대한)환상은 적었다”고 말했다. 그는 2학년까지 학과공부보다는 하고싶은 외부 활동에 집중했다. 하지만 취업전선에 뛰어든 선배들을 보면서 대학 이후의 삶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남씨는 “시간이 지나고 보니 나는 ‘준비되지 않은 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학이 자아실현의 장이라 생각했었는데, 취업준비의 장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고 말하며 쓴 웃음을 지었다. 3학년이 되어 뒤늦게 커리큘럼 따라가기에 급급한 스스로가 ‘학점의 노예’로 전락한 것 같아 씁쓸하다고.

대학 판타지를 기대할 여력도 없이 공부에 매진하는 경우도 있다. 중국 북경대학 의학부에 유학중인 임민아(23)씨는 “한국에 있을 때는 남들처럼 대학에 대한 환상을 많이 가지고 있었지만 유학 오면서 현실적인 부분을 생각하게 됐다”고 말한다. 중국 학생들보다 훨씬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수업 진도를 따라가는 것조차 힘들기 때문이다.

쉼표. 내 인생에 다시없을 무한자유를 만끽하다

열심히 공부한 당신, 휴학하라! 평생에 이렇게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젊음의 ‘자유시간’을 아작아작 씹어 먹을 수 있는 시간이 또 있을까. 대학시절 휴학하고 다녀오는 여행은 평생 잊지 못할 인생의 경험이 된다. 그러나 이제는 열심히 공부‘한’ 당신이 아닌, 열심히 공부‘할’ 당신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또는 새로운 경험이나 자유를 만끽하기 위해 했던 이전의 휴학과는 달리, 영어공부나 취업준비 때문에 휴학하는 학생들이 많은 까닭이다.

휴학하고 한 달동안 동남아 배낭여행을 다녀온 경희대학교 임예람(사회 · 07)씨는 휴학을 통해 인생의 진정한 ‘여유’를 맛봤다. 임씨는 고등학교 때부터 대학생이 되면 꼭 한 번 휴학을 하고 여행을 다녀와야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그는 “태국과 라오스 두 개 국가를 다녀왔는데, 이제껏 빈틈없이 치열하게 사는 법만을 알고 그렇게 살아온 내 삶에 이번 여행은 진정한 ‘삶의 다양성’을 느끼게 해줬다”고 말했다.

자아를 찾는 과정으로 휴학을 선택한 학생도 있다. 구아름(국제관계 · 07)씨는 2학년 말 대학생활에 대한 회의감에 휴학을 결정한 케이스다. 평소 똑부러진 언행으로 ‘완벽주의자’라는 평까지 들었던 그녀가 휴학을 결심하자 주변은 놀랍다는 반응이었다. 구씨는 담담한 목소리로 “이건 당장의 발표나 시험 준비에 급급한 캠퍼스의 삶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런 모습으로 무엇을 이룰 것인가, 어떻게 사회에 나갈 것인가, 라는 생각 끝에 휴학을 결정했다는 것. 그녀는 “마냥 쉬는 것이 아니라 틈틈이 교환학생 준비도 하고 있다. 이번 휴학을 통해 나 자신을 알아가고 성인으로서의 자신을 찾아가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그래도 취업 준비를 위한 휴학생이 절대 다수다. 김정렬(사학·02)씨는 졸업을 한 학기 남겨두고 휴학을 결정했다. 김씨는 “내가 입학할 때만 해도 ‘대학오기까지 고생했으니까 이제 좀 놀아도 된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이 때문에 신입생 때 공부보다는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만드는데 집중했었다”고 말했다. 그는 “1,2학년 때부터 취업 준비를 하는 것은 좋지만, 유일하게 놀 수 있는 시기인 만큼 실컷 놀기도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도돌이표. 환상은 계속 된다

 

▲ 신입생만이 아니다. 학년이 올라가도 형태만 바뀔 뿐 대학판타지는 계속된다.

환상은 깨라고 있는 게 아니다. 환상을 통해 우리는 현실의 고통을 견디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는다. 88만원 세대, 이태백(이십대 태반이 백수), 잉여인간 등 암울한 단어들의 굴레에도 불구하고 대학시절은 젊기에 찬란하다. 그 찬란한 시절을 제대로 만끽하지 못하는 청춘은, 찬란해서 더 슬프다.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꿈에서 깨어났을 때 갈 길이 없는 것입니다.
꿈을 꾸고 있는 사람은 그래도 행복합니다.
아직 갈 길을 발견하지 못한 경우라면,
가장 긴요한 것은
그를 꿈에서 깨우지 않는 것입니다.

- 루쉰(魯迅)의《아침꽃을 저녁에 줍다(朝花夕拾)》중에서 -


Fine.

 

송은지 기자 lifeholic@yonsei.ac.kr

저작권자 © 연세춘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