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가치창조'와 함께한 이희명씨

 

올해는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이 출간된 지 150주년이 되는 해다. 이 때문에 올해 세계 학계는 종과 진화에 대한 얘기로 들썩였다. 관심을 가진 건 과학자들만이 아니었다. 이희명 미술작가는 종과 진화라는 과학적 주제로 미래의 생명들에 대한 작품을 탄생시켰다.

이 작가의 미래 세상에서, 애벌레를 잡아먹던 원숭이는 애벌레를 우상처럼 여긴다. 벌레를 사냥하던 새들은 오히려 벌레에게 잡아먹힌다. 또한 식물들은 자유롭게 촉수를 움직이며 먹잇감을 찾고, 사람의 신체는 하등동물로 분류되는 생물로 진화해간다. 이러한 세상은 우리가 지금까지 배워 온 진화와 약육강식이라는 개념을 완벽하게 뒤엎는다. 하지만 전혀 존재할 수 없는 세상이라고 할 순 없다. 그녀의 세상은 현실과 다를 뿐 진화론에 어긋나지 않는 곳이기 때문이다.

벌레로 진화하는 사람

이 작가의 작품들은 대부분 이종(異種)생물들의 교접이나 변형, 진화를 보여준다. 하지만 그녀의 작품에서 진화란 하등생물이 고등생물로 변하는 것이 아닌 고등생물이 하등생물로 퇴화함을 의미한다. 이 작가는 “사람들은 흔히 인간이 고등생물이라는 생각을 하고 가장 뛰어난 생물이라 생각한다”며 “플라나리아는 몸이 잘려도 죽지 않고 재생되는데, 이는 인간에게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라고 고등과 하등을 분류하는 것을 거부했다.

 

'진화'

 

그녀는 아무리 고등생물이라도 자연에 맞지 않으면 하등생물보다 뛰어날 것이 없다고 그녀의 작품 '진화'를 통해 이야기 한다. '진화'는 사람의 손가락이 기괴한 유충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사람이 고등하다고 하지만 자연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면 살아남을 수 있는 존재인 유충으로 변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윈의 ‘자연 선택’을 잘 나타낸 이 작품은 생물학자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녀에게 종(種)이라는 개념은 수직적 구조가 아닌 고등생물도 하등생물도 평행하게 놓여 있는 수평적 구조이다. 그리고 진화는 어떤 생물이 자연에 적합해지도록 종이라는 수평축에서 그 종의 위치를 좌우로 움직이는 것이다.

인간중심의 철학을 버리다

이 작가는 종과 진화와 관련된 작품을 만들게 된 계기에 대해 묻자 ‘추함’과 ‘아름다움’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녀는 “우리는 꽃이 피는 모습을 아름답다고 말하며, 꽃이 지는 모습을 추하다고 한다”며 “꽃이 피는 모습도 기괴하고 추할 수 있는데 아름다운 것이라고 인간이 멋대로 정의한 것”이라고 했다. 이런 인간위주의 삶이 고등생물과 하등생물이라는 생물의 수직적 구조를 만든 것은 아닐까? 그녀의 몇 작품에서는 이를 비판하는 모습이 보인다.

 

'MEET'

 


이 작가의 작품 'MEET'에서는 사람이 고기를 포식하는 권위적 행위를 비판하며 ‘우리가 먹는 고기가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으면 우리는 이 고기를 먹을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 고기가 사람의 형상으로 보이는 순간 우리는 사람을 만나게(meet) 되는 것이며, 고기는 더 이상 고기(meat)가 아니다. 이렇듯 그녀는 진화론 이전부터 있어온 인간중심의 철학사상을 그녀의 작품에 담아 보여준다.

진화, 그 무궁무진한 가능성

이 작가의 작품에서는 미래의 환경에 맞게 변화해 가는 생물들의 모습도 볼 수 있다. 그녀의 작품 '가치창조'에서, 나날이 상승하는 기온과 하루하루 줄어드는 빙하를 바라보며 어쩔 수 없이 진화를 선택한 바다표범은 그 본연의 모습을 거의 갖고 있지 않다. 자연의 변화에 바다표범은 가죽이 늘어지며 추한 모습으로 변해 갈 뿐이다.

그러나 그녀의 '변형식물'시리즈는 식물이 황폐해진 토양에서 더 이상 양분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인지 지상의 생물들을 공격할 수 있도록 강인해진 모습을 보여준다. '포식자'에서는 벌레가 먹잇감의 대상을 식물이 아닌 새로 삼아 새를 잡아먹고야 만다. 자연의 변화 아래에서는 하등한 생물들도 강인해질 수 있고, 포식자의 위치에 설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말한 것이다. 마치 백악기 시절 파충류에게 영원히 지배당할 것만 같던 포유류들이 지금 되려 파충류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 작가는 종의 진화라는 주제를 사람들에게 예술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한결 가깝게 만들었다. 그녀는 인터뷰를 마치며 “저는 과학을 잘 몰라요”라고 수줍게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작품에서는 과학의 냄새가 계속 감돌았다. 상상만으로 이루어지는 예술이 아닌 과학과 함께하는 예술, 앞으로 그녀가 보여줄 과학적 예술을 기대해 본다.

박기범 기자 ask_walker@yonsei.ac.kr

사진 박선종 기자 ganzinam@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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