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적인 예를 들어, 남녀 차별 문제로 열띤 토론을 하고 난 후 정리한답시고, 사회자가 나서서 “남성분들이 모든 여성들을 각자의 여동생이나 딸들이라고 생각한다면야 이러한 일들이 왜 일어나겠습니까?” 운운할 때가 있다. 분명 토론은 공적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여성 차별에 관한 것이었고, 그것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갑론을박 공적 대화를 나눴으면서도, 이를 정리하는 마당에서는 굳이 가족 관계라는 사적 영역을 끌어들여야 속이 시원한 게 우리네 ‘정서’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가족이야말로 여성 억압이 시작되는 가장 기본적인 단위가 아닌가. 언제나 인내하고 희생하는 어머니, 아기자기한 맛이 있어야 하고 급기야는 음식의 고명 같은 존재가 되는 딸.

우리가 남을 부를 때 무어라고 부르기가 애매하면, 대충 친족어를 사용한다는 사실은 재미있는 일이다. 남모르는 사람을 부를 때도 우리는 경우에 따라 ‘삼촌’이나 ‘이모’라는 말을 사용하곤 한다. 하지만 아저씨 아줌마(아주머니) 같은 말은 이미 친족어라는 인식이 사라져서인지, 지칭으로도 널리 사용된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친족어가 호칭으로 많이 사용되는 것일까? 사실 얼굴을 맞대고 하는 대화에서 호칭은 상대방과 나의 관계를 1차적으로 규정짓는 매우 중요한 호출 행위이다. 상대방을 대화에 끌어 들이기 위해서 제일 먼저 하는 행위가 그를 부르는 것이고 또 그 대화를 유지하여 자기가 원하는 것을 달성하기 위해서도 상대방을 간간히 그리고 적절히 불러 줄 필요가 있다. 이른바 대화전략에서 호칭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잘 못 부르면 대화 자체가 성립하기 어렵고, 어렵사리 이루어진 대화도 그를 까딱 잘못 불렀다간 말짱 헛것이 될 위험성이 항상 도사리고 있다. 이렇게 중요한 호칭에서 친족어는 독특한 기능을 하게 된다.

 대화를 하면서 우리는 호칭을 통해 대화 참여자 간의 ‘힘’과 ‘유대’를 전략적으로 조절하게 되는데, 친족어의 경우 서로간의 위계가 뚜렷해지면서도 동시에 유대감까지 확보할 수 있는 묘한 특징이 있다. 가족만큼 위계가 확실하고 강력한 유대감을 지닌 집단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따라서 적절한 친족어만 찍어 붙이면 그야말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공적인 의사소통의 영역인 경우이다. 공적 공간에서도 친족어를 통해 사적 유대감과 위계에 기대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분명 미성숙의 징표이다.

대학은 고등교육 기관이다. 또 성인들이 모여 가르치고 배우며 토론하는 장소이다. 사회에서 대학이 가지는 발언권이나 그 위상이 예전만 못 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학이 공적 영역에서 담당하는 기능이 축소되거나 무시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따라서 대학에서 이루어지는 의사소통의 양식은 이 공적 기능에 합당한 것이어야 할 터이다. 이는 사사로운 유대와 위계의 도움으로 문제를 풀어서는 곤란하다는 뜻이다.

요즘 대학 사회에서 호칭으로 인한 갈등이 있는 모양이다. 구체적으로 서로 어떠한 호칭을 사용하고 그것이 어떠한 분란을 일으키는지 자세히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해결 방안이 공적 영역의 의사소통에 적합한 형태이어야지, 사적 영역의 유대 및 위계와 뒤엉킨, 그야말로 ‘끈적끈적한’ 것이어서는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 것이라는 점이다. 요즘 젊은이들의 말마따나 ‘쿨’해져야 하는 해결이 방안이 보일 것이다.

김하수 교수
(문과대·사회언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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