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와 현재를 잇는 주파수

 라디오 이야기를 시작할 때면 꼭 인용되는 문구가 있다. 영국의 뉴웨이브 밴드 ‘버글스’의 노래제목인 ‘비디오가 라디오스타를 죽였다(Video killed the radio star!)’가 그것이다. TV를 대표주자로 해 ‘보는 것’의 시대가 열리면서 ‘듣는 것’의 상징인 라디오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듯 보였다. 그러나 예상했던 결과와는 달리 라디오는 여전히 열렬한 팬들을 거느리며 새로운 ‘라디오 키드’*세대를 꿈꾸고 있다. 대체 그들을 끌어 모은 라디오의 은밀한 매력은 무엇일까.

어떻게 라디오가 변하니

방 한구석에 먼지 폴폴 쌓여 잠드는가 싶었던 라디오는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변신하기 시작했다. 바로 ‘보이는 라디오’와 ‘웹 라디오’다.
보이는 라디오는 영상시대에 발맞춘 서비스다. 목소리로만 만나던 DJ와 게스트를 라디오가 진행되는 동안 눈으로도 만나볼 수 있다. ‘MBC 신동·김신영의 심심타파’의 손한서 PD는 “보이는 라디오를 통해 비주얼 시대의 젊은 친구들에게 어필할 수 있다”며 “방송 내용이 인터넷에 공개되면서 홍보효과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인터넷으로 라디오을 방송하는 웹 라디오는 그동안 라디오가 가졌던 여러 단점을 보완한다. 각 방송사의 웹 라디오 프로그램으로는 KBS의 ‘콩’, SBS의 ‘고릴라’, MBC의 ‘미니’, EBS의 ‘반디’가 있다.
청취자들은 웹 라디오로 주파수가 닿지 않는 지방, 심지어 외국에서도 원하는 방송을 즐길 수 있다. 또한 웹 라디오를 제공하는 프로그램의 다양한 기능으로 한층 더 가깝게 DJ, 라디오 제작자들과 소통할 수 있다. 이 중 가장 눈에 띄는 기능은 바로 ‘쪽지’기능이다. 방송을 듣고 있는 청취자가 느낌이나 생각을 쪽지로 보내면 DJ나 작가들이 답쪽지를 보낸다.
사연을 보내는 방식 역시 간편하게 변했다. 더 이상 엽서가 우체국을 통해 방송국에 전달될 때까지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홈페이지에서 클릭 한 번으로 자신의 사연을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실시간으로 DJ에게 문자메시지를 통해 신청곡이나 사연을 ‘쏠’ 수도 있다. 열혈 청취자 곽나경(19)양은 “학원에 갈때나 공부할 때 친구에게 보내는 것 처럼 문자를 보낸다”고 말했다.

라디오의 변신은 유죄?

그러나 이렇게 눈부시게 현대화된 라디오의 변신을 모든 팬들이 달가워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그와 오래도록 함께한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들은 라디오의 장수비결이 변신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만의 고유한 특성에 있다고 이야기한다.
‘MBC 타블로와 꿈꾸는 라디오(아래 꿈꾸라)’의 김재영 작가는 “영상을 통해 채워질 수 있는 부분은 한정돼있는 반면 라디오는 상상을 통해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 수 있게 해준다”고 말한다. 비록 청취자들이 ‘보는 것’으로 변한 라디오에 일시적으로 끌릴 수는 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생각해보면 이것은 ‘듣는 것’으로서 라디오가 가지는 독자적인 매력을 오히려 저하시키는 요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라디오가 변신 후 예전만큼 충분하게 ‘듣는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해주지 못한다는 지적도 있다. 웹 라디오를 통해 소통방식이 즉각적으로 변하면서 듣는 이들은 이제 다른 사연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자신의 사연이 채택되기만을 원하게 됐다. 또한 DJ의 비중이 너무 커져, 음악을 들려주는 데 치중해야할 라디오의 본분을 잃었다는 것 역시 반복해서 지적되는 부분이다. 청취자 나윤정(21)씨는 “DJ들이 재미있게 프로그램을 엮어나가는 것은 좋지만 그 때문에 소개되는 사연이나 음악의 양이 줄어들어서 탐탁지 않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들이 가장 열광하는 라디오의 매력은 무엇일까?
라디오는 청각에 집중하기 때문에 청취자들은 디제이의 숨소리하나 말의 어조 하나까지 잡아낸다. 이 같이 매체가 가진 민감한 특성으로 청취자들은 DJ와 대화하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되고 친밀감을 형성한다. 타매체에서는 느낄 수 없는 이 친밀감은 듣는 이가 라디오를 방송 기계가 아닌, 하나의 친구로 생각하도록 만든다. 팝 칼럼니스트 김태훈씨는 “라디오를 구시대의 유물로 보는 사람이 많은데 쌍방성이라는 측면에서보면 라디오만큼 최첨단의 매체는 없다”고 말한다. 이어 김씨는 이런 현대인들이 “음악을 듣기 위해서보다는 사람의 목소리가 그리워서, 정서적으로 이야기를 나눌 이들이 필요하기 때문에 라디오를 찾는다”고 말한다.
현대로 접어들면서 사람들이 음악을 접할 수 있는 창구는 다양하지만 정작 서로가 소통할 수 있는 창구는 오히려 부족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TV는 시청자를 앉혀놓고 구경을 시키는 반면 라디오는 끊임없이 듣는 이를 자기 안에서 이어준다.

아니, 라디오는 스타다

겉모습은 너무도 많이 변했고 앞으로도 계속 변할테지만 라디오가 전하는 그 감성만은 1927년 우리나라에서 정규 방송이 시작되던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김작가는 “라디오는 매일매일 만나면서 정이 드는 특별한 매체”라고 말한다. 매일 전하는 자신의 감성에 친근해지는 청취자를 가족으로 만드는 것, 라디오가 여지껏 사랑 받는 가장 큰 이유다.
늦은 밤, 세상 모든 사람이 잠들고 나만 깨어있는 듯한 그 밤에 라디오는 외로운 이의 마음을 두드린다. 그리고 그는 우리가 잊고 있었던 수많은 사람의 기쁨, 즐거움, 한숨들을 ‘나’와 이어 줄 것이다. 지금까지 늘 그래왔던 것처럼.

글 김규진 기자 loveme@
사진 김지영 기자 euphoria@

*라디오 키드 - 라디오가 주매체였을 때 그를 곁에 두고
영향을 받으며 성장한 사람을 지칭하는 말

저작권자 © 연세춘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