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냉면, 포도, 바나나, 토마토, 그리고 소주가 있다. 아무 음식을 무작위로 나열해 놓은 것 같지만 이 음식들에도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바로 찬 온도에서 먹어야 맛있는 음식들이다. 따뜻한 소주, 뜨거운 토마토, 먹어본 사람들이라면 손을 절레절레 흔들 것이다. 왜 같은 물질으로 구성됐는데도 다른 맛이 느껴지는 것일까?

  이런 현상을 일으키는 이유에는 ‘소주는 차게 먹어야 맛있다’와 같은 사회적 통념이 미각에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도 포함된다. 하지만 앞에서 예를 든 음식들은 실제로 온도가 높아지면 맛이 없다. 이는 물질 그 자체에 변형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외관상으로는 변화가 없을지 몰라도 음식을 이루는 분자들에는 변화가 일어난다.

  우리는 주로 단 맛이 느껴질 때 ‘이 음식은 맛있는 음식’이라고 생각한다. 담백하거나 매콤한 음식도 우리가 맛있다고 하지만 그 음식들 속에도 단맛은 기본적으로 포함돼 있다. 음식 속에서 단 맛을 내는 대표적인 물질은 포도당(glucose)이다. 포도에 가장 많이 함유돼 있어 포도당이라 이름붙인 이 물질은, 대부분의 과일과 채소의 단맛을 담당한다. 심지어 소주 원액의 담백한 맛을 없애고 달짝지근하게 만들기 위해서 사용되기도 한다.

  포도당은 아래 그림에 나온 것처럼 고리 모양의 분자이며 α형과, β형의 두 가지 형태가 존재한다. α형 포도당<그림1>과 β형 포도당<그림2>은 아래 분자식에서 나타나듯이 수소(H)와 수산화기(OH)의 위치가 뒤바뀌어 있다. 작은 차이지만 이 차이로 포도당의 특성이 변하는데, 대표적인 차이로 α형 포도당은 단맛이 있고 β형 포도당은 단맛이 거의 없다.

  음식의 맛의 변화는 이 포도당의 변화에서 온다. 김관수 교수(이과대·탄수화물화학)는 “α형 포도당과 β형 포도당은 상온에서 공존한다”며 “α형은 β형으로, β형은 α형으로 변화가 가능하다”라고 말했다. 포도당에 열을 가해주거나 포도당이 갖고 있는 열을 방출하면 포도당의 고리구조가 끊어진다. 끊어진 고리구조가 다시 붙는 과정에서 고리가 회전하고 수소와 수산화기의 자리가 바뀌게 된다.

  외부에서 음식에 열이 가해지면 α형 포도당은 β형 포도당으로 변한다. 온도가 높아짐에 따라서 단맛이 많은 α형 포도당이 단맛을 많이 포함하고 있지 않은 β형 포도당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원리 아래 우리는 ‘음식이 온도가 높아지면 맛이 없어진다’라고 생각하게 된다.

  포도당이 녹말의 기본 구조라는 것을 아는 독자라면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들 것이다. 지금까지의 내용에 따르면 포도당이 포함된 음식은 차가울수록 맛있어야 한다. 그런데 포도당을 기본 구조로 하는 녹말을 주재료로 삼는 라면, 밥, 고구마 등의 음식들은 대부분 뜨거울 때 맛있다.

  이 의문은 녹말이 포도당으로 분해될 수 있을 뿐, 포도당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안다면 쉽게 해소된다. 1 더하기 1 은 2 가 되지만 2 = 1 이 성립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포도당과 마찬가지로 녹말 역시 α형 녹말과 β형 녹말 두 가지 구조를 가지고 있다. α형 녹말은 구조가 부드러워 소화가 잘 되지만, β형 녹말은 구조가 단단하다. 상온에서 녹말은 주로 β형으로 존재하는데 열을 가해 주면 맛있는 α형 녹말로 변하게 되고 우리는 그 때 음식이 맛있다고 느낀다.

  우리가 어떤 재료를 어떤 온도로 요리해 먹는 것. 뭔가 당연할 것 같은 이런 이치들 속에도 과학의 원리는 항상 숨어 있다. 오늘 수업을 마치고 친구들과 혹은 이성친구와 밥을 먹으러 간다면 한번 생각해 보자. ‘이 음식은
어떤 온도일 때 제일 맛있을까?’ 조금은 지적인 당신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글 박기범 기자 ask_walker@yonsei.ac.kr
일러스트레이션 남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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