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을 품거나 문화를 꿈꾸거나, 서울의 궁(2)

- 기획의도

건물만이 빽빽이 들어찬 대학가에서 과거의 낭만은 눈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학업과 취업을 위해 앞만보고 달려야하는 대학생들이 한숨 들이쉴 곳은 어디에도 없는 듯하다. 그나마 학내에 남아있던 여유공간도 강의공간이나 주차장으로 대부분 대체됐다.
「연세춘추」 문화면에서는 이렇게 쉴 곳 없는 대학생들이 거닐며 사색할 수 있는 공간으로 서울의 ‘궁’을 소개한다. 우리대학교는 서울의 고궁들과 지리적으로도 가까워 버스로 몇 정거장이면 고요한 옛 역사의 터와 만날 수 있다. 건물 숲을 벗어나 운치와 풍경을 더불어 즐기고 싶은 당신, 여기 조선이 머물던 흔적을 찾는 것은 어떨까.
                                    - 지난 ‘궁’ 첫번째 이야기는 인터넷 연세춘추 1591호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때맞춰 찾아온 가을의 손길에 발그레한 단풍이 제자랑하기 바쁘다. 지난 10월 13일 문화재청에서는 조선조 궁궐과 왕릉의 단풍시간표를 발표했다. 단풍색 곱기로 소문난 궁궐 내 명소의 ‘단풍지수’를 주 혹은 일별로 조목조목 정리해놓은 것이다. 이와 더불어 열리는 ‘산책로 낙엽밟기’나 백일장 등의 행사들은 사람들에게 좀더 친숙하게 다가려는 궁들의 노력이다. 덕분에 서울의 궁은 오랜만에 손님맞이가 한창이다.

꽃피고 새 노니는 아름다운 궁, 창덕궁

창덕궁은 서울의 다섯 궁 가운데 유일하게 안내원에 의한 시간제 관람을 실시하고 있다. 지난 16년간 자유관람이 이루어졌지만 관람객들의 무분별한 관람문화로 궁 안의 문화재와 자연이 크게 파괴됐기 때문이다.
창덕궁의 대문은 돈화문이다. 본래 문 곁으로는 시냇물이 흘러 궁과 자연의 어울림을 극대화시켰다. 그러나 문 앞으로 길이 나고 창덕궁 주변으로 동네가 들어서면서 물길이 모습을 감추게 됐다. 창덕궁 관계자는 “여러 가지 큰 공사가 추진되면서 지하수맥이 내려가 건천도 흐를 수 없게 됐다”며 “창덕궁에서도 시내를 다시 흐르게 하는 것을 장기과제로 설정해 구체적 방법을 모색 중”이라고 전했다.
정문을 지나 두 개의 마당을 지나면 창덕궁의 중심 공간인 인정전에 이른다. 인정전의 곁에는 임금이 일상적으로 집무를 보았던 선정전이 자리하고 있다. 선정전은 청기와로 덮여있어 다른 건물에 비해 눈에 띈다. 울긋불긋한 단풍 가운데 푸르른 선정전의 지붕은 마치 하늘을 얹어놓은 듯 하다.
몇개의 건물을 지나면 낙선재에 이른다. 경빈 김씨에 대한 헌종의 극진한 사랑으로 만들어진 이곳은 여러가지 볼거리로 눈을 즐겁게한다. 아름답게 조성된 정원은 말할 것도 없고 둥그렇게 뜬 달을 닮은 만월문과 함께 이어진 꽃무늬담, 건물 창살들은 예술작품이라 할만하다. 마루 밑을 받치는 돌 표면은 신비로운 문양을 새겨 넣어 섬세하게 마무리했다.
창덕궁의 남다른 아름다움은 후원에 있다. 그 중에서도 후원의 꽃이라 불리는 부용정은 가을이면 더욱 장관을 이룬다. 연못인 부용지와 애련지 모두 연꽃을 본떠 만들었다. 숙종은 「애련정기」에서 “연꽃은 더러운 곳에 있으면서도 변하지 않고 우뚝 서서 치우치지 아니하며 지조가 굳고 맑고 깨끗하여 군자의 덕을 지녔다”며 연꽃에 대한 특별한 마음을 밝혔다.
건물들 너머 산 깊은 곳에 위치한 옥류천은 창덕궁의 자랑이다. 옥류천의 관람 코스는 따로 운영되고 있다. 창덕궁 관계자는 “2004년 개방 전까지 자리잡아있던 생태계를 보호하는 차원에서 관람 일정을 분리했다”고 말했다. 면적의 70%가 산지인만큼 창덕궁은 자연과 공생하는 궁궐을 만드는데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창덕궁

왕실 여성들의 내밀한 이야기가 깃든 창경궁

창경궁은 왕이 거하는 창덕궁 곁에 왕후들의 거처로 삼기 위해 성종 연간에 건축됐다. 창덕궁이 왕이 거하는 궁으로서의 위엄을 지닌다면 창경궁은 여성스럽고 오밀조밀하다. 창덕궁의 인정전과 창경궁의 정전인 명정전을 비교해봐도 그 성격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국가 행사를 담당하는 외전보다는 생활기거공간인 내전이 훨씬 발달한 것도 이 때문이다.
대문인 홍화문으로 들어서 걷다보면 정전인 명정전에 이른다. 명정전의 품계석을 지나 뒤뜰로 나오면 통명전이 보인다. 통명전은 건물에 서린 사연 때문에 창경궁의 건물들 중 가장 많이 회자된다. 전 앞 뜰에서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었고, 그 밑에는 장희빈이 왕비를 저주하는 나무 인형을 묻었다.
이 주변은 땅이 낮아 샘이 많다. 솟아나는 샘물을 끌어다가 만든 연못인 ‘지당’ 중간에 있는 돌 위에는 사람들이 올려놓은 동전이 수북하다. 과거 위에 미래의 소망을 던지는 모습이 기이한 느낌을 준다.
커다란 연못인 춘당지를 지나 조금 더 들어가면 유독 하얗게 서 있는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바로 구 창경원의 식물원이다. 일제는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격하시킨 다음 동물원, 식물원을 설치해 왕가의 집을 유흥거리로 전락시켰다. 문화재청 궁릉관리과 황권순씨는 “84년 이루어진 1차 복원으로 동물원을 없애고 몇몇 건물을 복원했지만 아직 부족하다”며 “현재는 2차 장기복원 계획을 추진 중이고 창덕궁과 창경궁의 구조를 담은 「동궐도」를 기반으로 할 예정이다”라고 전했다.

창경궁

굴곡많은 옛기억을 딛고, 경희궁

경희궁은 큰 건물들 사이에서 위태롭게 몸체를 지키고 있는 비운의 궁이다. 사실 경희궁은 일제의 극심한 훼손으로 조선말에는 터만 남았다. 현재 볼 수 있는 몇 개의 건물도 그나마 이후 복원된 것들이다.
정문인 흥화문은 주인인 궁의 처지를 따라 원래있던 자리에 서지도 못하고 건물사이에 치여있다. 경희궁의 정전인 숭정전은 복원돼 겨우 구색을 맞추고 있지만 반질거리는 새 건물과 새 돌들이 과거를 반추하기에는 어색하다.
이렇게 상처뿐인 경희궁이 요새들어 여러 가지 경사를 치르고 있다. 타 궁들은 문화재청에 소속돼있는 반면 경희궁은 서울시에서 관리하고 있어 시에서 열리는 여러 행사에 활용된다. 지난 10월 12일까지 경희궁 숭정전에서 공연된 뮤지컬 「대장금」은 관객들로부터 호평을 얻었다. 문화예술과 김재민 주임은 “관객들은 역사적 현장에서 관련된 내용의 공연을 매치해 볼 수 있고 실외공연이니만큼 궁의 아름다움까지도 즐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이서울페스티벌’의 가을축제에서는 경희궁 공원에 특설무대를 마련해 태권도와 비보이, 국악을 퓨전한 ‘태권도 퍼포먼스’를 공연했다. 문화정책과 이창훈 주임은 “서울의 역사와 자연을 함께 느낄 수 있는 주제를 정해 시민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것이 목적”이라고 말했다.
이같은 다채로운 행사들은 경희궁을 알리는데 분명히 기여한다. 하지만 이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다양한 문화코드를 궁과 결합시키는 것이 이목을 끌 수 있지만 궁이 가진 고유한 분위기를 훼손시킬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이에 한 궁 담당자는 “궁중의례를 복원하되 시대와 너무 동떨어지지 않게 현대적 감각만을 가미하는 것이 옳은 것 같다”며 “궁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보고자 하는 것은 공연장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는 것들이 아니라 궁에서만 찾을 수 있는 그 무엇일 것”이라고 말했다. 과거의 자취를 어떻게 미래로 가지고 갈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우리가 함께 안고가야 할 과제인 것이다.
이렇게 궁들은 그만의 방법으로 제 모습을 찾아가며 다시 사람들에게 문을 열었다. 올 가을, 미처 정리하지 못했던 생각부터 청춘만이 가질 수 있는 고민들까지 한가득 짐을 가져가 조용한 옛터에 풀어놓는 것은 어떨까. 오색 단풍이 번져있는 자연의 틈에서 한결 수월하게 그 답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글 김규진 기자 loveme@
사진 김지영 기자 eupho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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