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7년 중순부터 비우량주택담보대출(subprime mortgage) 시장이 무너지면서 미국의 금융시장과 경제가 침체의 길로 들어섰고 그 여파는 전 세계로 확산됐다. 여기에 기름을 붓는 격으로 지난 8월 패니메이 프레디맥 등 미국의 최대 국책 주택담보대출은행들이 파산위기에 몰리고 이어 9월에는 리먼브라더스, 메릴린치 등 상위 투자은행들이 파산신청을 냈다. 이에 미연방준비은행이 850억 달러를 투입해 파산위기에 처한 AIG 보험회사를 구제하는 등 거대 금융기관들의 파산 도미노가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 미국의 금융위기는 곧 세계경제의 금융위기로 이어져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혼동상태가 전개되고 있다.
미국 정부는 급기야 7천억 달러에 이르는 막대한 자금을 금융시장의 붕괴 방지를 위해 긴급수혈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이처럼 극단적인 긴급 수혈 정책이 발표됐음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호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특히 국제환경의 변화에 민감하게 영향을 받는 한국경제의 경우에도 주가폭락, 환율급등, 경제침체 등 심각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현 정권이 아직도 뚜렷한 경제정책의 비전과 방향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우리를 덮치고 있는 위기의 파도는 시장의 위기의식을 더욱 증폭시킨다.
현재 가장 첨예한 단기적 문제는 치솟는 환율을 안정시키기 위해 외환보유고를 외환시장에 풀 것인지에 대한 정책적 의사결정이다. 일부에서는 시기를 놓치기 전에 당국이 외환시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환율을 안정시킴으로써 시장참여자들에게 안도감을 줘야 한다고 주장한다. 시기를 놓치면 정책당국이 개입해도 치유가 불가능한 상황이 올 수 있다는 것이다. 대미 달러 환율이 1천500원 대가 되면 ‘킥인 킥 아웃 옵션(KIKO)’을 구입한 500여 개 중소기업의 손실액이 2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는 점 등을 감안하면 이와 같은 주장은 일견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문제는 정책당국의 개입으로 환율이 효과적으로 통제될 수 있는가하는 점이다. 경제정책에는 다분히 심리적인 요인이 강하게 작용하는 경향이 있다. 정책당국이 환율을 안정시키겠다는 정책을 발표했을 때 많은 경제주체들이 정부의 발표를 신뢰한다면 정부는 약간의 외환을 시장에 푸는 것만으로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제주체들이 정부의 정책수행능력을 의심하여 환율은 여전히 오를 것이라고 예상한다면 정부가 환율을 낮추기 위해 실제로 시장에 외환을 쏟아 부어도 환율을 쉽게 낮출 수 없게 된다.
현 정권이 집권 초기에 시행한 고환율 정책은 원칙도, 실리도 모두 잃은 실패한 정책으로 판명된 바 있다. 외환정책에 있어서 시장의 신뢰를 상당 부분 상실한 현 정권이 외환시장에 개입함으로써 효과적으로 환율을 낮출 수 있을지의 여부는 매우 불투명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더구나 미국의 금융시장 침체가 얼마나 더 깊어질지에 대한 정확한 예측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정책당국이 외환보유고를 지금 내다 쓰는 것이 옳은 판단인지도 알 수 없다. 지나치게 환율 통제에 몰두하다 자칫 외환보유가 바닥나는 사태가 발생한다면 국가위험도가 높아지는 더 어려운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
지금 정부가 해야할 가장 중요한 일은 비전의 제시와 정책의 일관성을 통해 유사시 정책을 집행할 때 정책효과가 극대화 될 수 있도록 시장으로부터의 신뢰를 회복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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