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8년 1월, 강원도 산골 ‘실레마을’의 한 집에 남자 아이가 태어났다. 형 한 명, 누나 다섯 명, 여동생 한 명의 다복한 집안이었다. 그러나 열 살도 안 되는 나이에 연이어 겪은 어머니와 아버지의 죽음은 그에게 깊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과묵하고 순진한 청년으로 자란 그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50편이 넘는 글을 남긴 그는 태어난 지 스물여덟 해, 짧은 삶을 뒤로 하고 다시는 눈을 뜨지 못했다. 그리고 1년 뒤, 그의 단편 『동백꽃』이 발간됐다. 탁월한 언어감각으로 글을 빚어냈던 작가 김유정, 그가 태어난 지 100년이 되는 2008년에 그가 태어난 고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김유정, 그의 첫울음이 울린 ‘실레마을’

김유정이 태어난 ‘실레마을’로 향하는 첫걸음은 춘천으로 가는 경춘선 길목의 ‘김유정역’에서 시작했다. 이 역은 본래 ‘신남역’이었으나 지난 2004년 실레마을 출신인 김유정을 기념하기 위해 김유정역이 됐다. 얼마 안 되는 사람을 이 조그만 간이역에 내려놓고 기차는 제 갈 길을 따라 떠났다. 김유정역은 도시 기차역의 번잡함은 찾아볼 수 없는 한적한 시골 간이역이었다. 역 관리인 세 명만이 지키고 있는 대합실을 나서 ‘김유정문학촌’을 가리키는 표지를 따라 갔다. 녹음이 진 산을 뒤에 두고 노랗게 무르익기 시작한 논밭을 앞에 낀 언덕위로 실레마을의 ‘김유정 문학촌’이 보였다.

김유정은 잡지 『조광』에 실린 수필 「오월의 산골짜기」에서 자신의 고향을 이렇게 묘사했다.
‘나의 고향은 저 강원도 산골이다. 춘천읍에서 한 이십 리가량 산을 끼고 꼬불꼬불 돌아 들어가면 내닿는 조그마한 마을이다. 앞뒤 좌우에 굵직굵직한 산들이 빽 둘러섰고 그 속에 묻힌 아늑한 마을이다. 그 산에 묻힌 모양이 마치 옴팍한 떡시루 같다 하여 동명을 실레라 부른다’

금병산이라 불리는 산자락이 김유정이 묘사한대로 문학촌과 그 주변 마을을 둘러싸고 있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마을은 ‘솥’이란 뜻의 ‘실레’ 그대로 푸른 산 테두리 안에 노르스름한 벼가 하나 가득 들어있는 솥 모양일 것이었다. 이 마을을 배경으로 김유정은 「동백꽃」, 「봄?봄」, 「금 따는 콩밭」, 「만무방」 등 12편의 작품을 썼다.

김유정 문학촌에는 그의 생가와 기념전시관이 있다. 전시관을 화려한 장식으로 꾸며 놓지 않은 점이 소박한 김유정의 작품과 어울렸다. 철따라 고운 들꽃이 핀다는 뜰과 정자가 있는 작은 연못을 앞에 두고 김유정의 생가가 소복이 앉아있었다.

김유정의 집안은 그의 할아버지 대에 6천석 추수를 할 정도로 춘천에서 알아주는 명가(名家)였다. 초가지붕을 얹었지만 기와집 구조로 지어졌다는 집은 지금 보아도 큰 저택이었다. 한 차례 소실되었다가 복원된 생가 대청마루에는 견학을 온 중학생들이 모여 앉아 김유정의 생애와 작품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었다. 이 아이들 위로 100년 전 같은 자리에서 7명의 형제들과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을 어린 김유정이 겹쳐 떠올랐다. 

김유정, 펜을 들다

김유정은 몸이 약한 편이었다. 게다가 어릴 때는 말까지 더듬었다. 휘문고등보통학교 2학년 시절 말더듬 증세를 고치긴 했지만 그 후로도 말을 많이 하지는 않았다. 말이 서툴렀던 탓일까, 그는 사랑에도 서툰 모습을 보였다. 1930년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한 김유정은 첫사랑 박녹주를 만난다. 첫사랑이라고는 하지만 그의 일방적인 짝사랑이었다. 김유정은 한 번도 뒤돌아봐주지 않는 그녀에게 열렬히 구애하느라 학교에 나가는 것도 잊었다. 소설 「두꺼비」는 당시 그와 박녹주의 관계를 짐작하게 한다.

‘어디 사람이 동이 낫다구 거리에서 한번 흘낏 스쳐본, 그나마 잘 낫으면 이어니와, 쭈그렁 밤송이 같은 기생에게 정신이 팔린 나도 나렷다. 그럿두 서루 눈이 맞아서 달떳다면야 누가 뭐래랴 마는 저쪽에선 나의 존재를 그리 대단히 너겨주지 않으려는데 나만 몸이 달아서 답장 못 받는 엽서를 매일같이 석 달 동안 썼다’

그는 출석일수가 모자라 연희전문학교에서 제적처리를 당하고 만다. 그 뒤 고향에 내려온 김유정은 야학을 열어 학생을 가르치기도 했다. 1933년 그는 서울로 돌아와 공식적인 첫 작품 「산골나그네」를 발표했다. 그리고 그는 그의 남은 생을 괴롭힐 폐결핵 진단을 받는다. 김유정의 작품에는 그의 고향 실레마을이 곳곳에 등장한다. 「만무방」에서 주인공 응칠이가 노름을 하던 동굴도, 「산골나그네」에서 주인공 여인이 병든 남편을 숨겨 돌보고 있었던 물레방앗간 터도 실레마을에 남아있었다. 「봄봄」의 얄미운 장인어른 봉필영감은 실레마을에서 실제로 살았던 인물이었다. 마을에는 그 집터가 아직 남아있었다. 조용한 시골 마을에 터만 남아 있어 그런지 봉필영감의 집터는 그리움과 쓸쓸한 감상을 불러일으켰다. 집터 위로 한 차례 바람이 지나갔다. 바람이 불어온 곳을 바라보니 금병산 자락, 동백꽃의 무대가 된 곳이었다.

‘그리고 뭣에 떠다 밀렸는지 나의 어깨를 짚은 채 그대로 퍽 쓰러진다. 그 바람에 나의 몸뚱이도 겹쳐서 쓰러지며, 한창 피어 퍼드러진 노란 동백꽃 속으로 폭 파묻혀 버렸다.
알싸한, 그리고 향긋한 그 냄새에 나는 땅이 꺼지는 듯이 온 정신이 고만 아찔하였다’

「동백꽃」 中

강원도에서는 봄에 피는 노란 생강나무 꽃을 동백꽃 또는 산동백이라고 불러왔다고 한다. 김유정의 ‘동백꽃’도 빨간색 동백꽃이 아닌 노란색 생강나무 꽃이다. 김유정은 ‘노란’ 시각적 감각과 ‘알싸하고 향긋한’ 후각적 감각을 통해 두 남녀 사이의 감정이 이전과는 뚜렷하게 달라졌다는 걸 표현했다.

금병산의 동백꽃 길은 봄이면 동백꽃이 활짝 피어난다는 곳이었지만 꽤 가파른 산길을 따라 올라간 길에 동백꽃은 없었다. 여름날의 산자락에는 짙은 녹색만이 가득했다. 그러나 그 흐드러진 ‘노란’ 동백꽃과 사춘기의 ‘아찔한’ 첫사랑은 그 숲길 어딘가에서 봄을 기다리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김유정, 마침표를 미처 찍지 못하고

고향마을을 떠올리며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던 김유정은 1937년, 오래도록 그를 괴롭히던 병마에 결국 손에서 펜을 떨어뜨리고 만다. 그가 죽어 완성하지 못한 소설 「생의 반려」에는 이런 말이 등장한다.

‘저에게 원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제가 어려서 잃어버린 그 어머님이 보고 싶사외다. 그리고 그 품에 안기어 저의 기운이 다 할 때까지 한껏 울어보고 싶사외다’

그의 유해는 화장돼 서울의 한강에 뿌려졌다. 그러나 그의 혼은 어린 시절 어머니와 함께 지냈던 고향, 이곳 ‘실레마을’에 잠들어 있을 것이다.

 

글 박영일 기자 pyi0407@
사진 박선종 기자 ganzinam@

저작권자 © 연세춘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