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부부가 있었다. 남편은 가끔 대화를 나눌 때 아내가 말을 잘 듣지 못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내의 귀가 멀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어느 날, 남편은 아내가 청력을 잃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야겠다고 결정했다. 남편은 아내를 불렀다. 한 번, 두 번 …. 계속 불러도 대답이 없자 남편은 점점 큰 소리로 아내를 부르기 시작했고 마지막에는 집 밖에서도 남편의 목소리가 들릴 정도로 크게 아내를 불렀다. 그러자 아내가 남편 가까이와 귀에 대고 소리 질렀다. “아까부터 대답했는데 왜 그렇게 크게 소리를 질러요!”
이어폰은 자신이 원하는 소리만 골라 들을 수 있도록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소리를 들리지 않게 한다. 자신이 들리지 않을 것이란 생각은 하지 못하고 고함을 친 ‘남편’은 아내의 소리는 듣지도 않고, 듣지도 못한 채 자신만의 이어폰을 끼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어폰을 끼고 오랜 기간 생활하면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잘 들을 수 없다는 것은 메타포가 아니라 실제로 그렇다. 각종 귀에 관한 연구가 장기간의 이어폰 사용이 난청과 이명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귀를 반영구적으로 손상시켜 밖에서 오는 소리를 막는 질환들이다.
물론 이어폰으로 듣는 자신의 소리는 의미가 있다. 내면의 소리를 귀기울이는 것은 최근 행복을 찾고, 삶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사람들이 가장 즐겨 찾는 지침서다. 또한 자신이 즐겨 듣는 소리가 없다는 것은 곧 주관이 없다는 생각까지 들게 한다.
하지만 우리는 잠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우리의 나이가 몇인지를. 철근도 씹어먹을 나이가 막 지나간 우리는, 이제 철근을 소화시켜야 한다. 소화에는 운동이 필요한 법이다. 육체의 운동 뿐만 아니라 정신의 운동도 그에 해당한다. 다양함 속에 자신을 내어놓는 것이 바로 그 정신적 운동이 될 것이다.   마음 속의 이어폰을 빼자, 우리는 아직 고집불통보다는 고집융통이 어울려야할 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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