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오프를 넘나들며 스노비즘에 발을 담그다

‘크리스토퍼 드러라이트는 런던에서나 볼 수 있는 종류의 사람이었다. 그의 주된 직업은 아주 값비싼 최신 유행의 옷을 입는 것이었다. 드러라이트같은 사람들은 무위도식하며 시간을 낭비했다. 도박을 하고 만취할 때까지 술을 마셨다. 브라이턴이나 바닷가에 있는 다른 유명한 휴양지에서 몇 개월씩 시간을 보냈다. 그런 부류를 가장 완벽한 경지에 이르게 한 것이 마치 드러라이트인 것처럼 여겨질 지경이었다.’

수잔나 클라크의 소설 『조나단 스트레인지와 마법사 노렐』에 등장하는 ‘드러라이트’는 19세기 초 영국 사교계에 등장했던 ‘속물(snob)’의 전형을 보여준다. 당시 영국에서는 상류층을 동경해 그들의 고상함을 흉내 내려는 무리들이 잔뜩 나타났다. 그들은 갖은 편법으로 어떻게든 돈을 마련해 몸을 치장하고 여가를 즐겼다. 비록 겉만 화려한 빈껍데기 생활이었지만 보기에는 그럴듯해 보였다. 한편 ‘진짜’ 상류층의 눈에는 그들의 어설픈 흉내가 한심하게만 보였다. 결국 상류층은 스스로 ‘속물들’처럼 천박하게 보이는 것을 경계하는 의미로 그들의 작태에 경멸을 담아 불러 줄 이름을 붙여줬다. ‘스노비즘(snobbism, 속물주의)’이었다.

스노비즘, 그 안으로 한 발짝

스노비즘은 간단히 말해 과시적인 태도를 말한다. 과시의 대상은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가 될 수 있지만, 온라인 공간에서의 스노비즘은 ‘유식한 척’, ‘고상한 척’하는 지적 스노비즘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따사로운 햇살 아래에 한가로이 누워 있노라면, 더불어 앙드레 가뇽의 연주까지 함께라면, 더 이상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겠다.’

최근 블로그를 통해 지적 스노비즘이 확산되고 있다. ‘허세 근석’, ‘허세 려원’ 등 몇몇 연예인이 이름 앞에 ‘허세’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누리꾼들의 구설수에 올랐다. 이들이 블로그에 남긴 글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허세를 부린다’, ‘잘난 척 한다’며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블로그의 게시물이 문제가 되는 것은 개인적인 공간인 동시에 24시간 자유로운 접근이 허락된 개방공간이라는 블로그의 특성 때문이다. 청년문화원 박준표 연구원은 “블로그의 글이 사회를 향한 발표인지 개인적 잡담인지는 구분할 수 없다”며 “갈수록 그 차이는 모호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블로그는 독백을 가장한 방백이 이뤄질 수 있는 1인무대인 셈이다
하지만 이런 글을 모두 지적 스노비즘으로만 볼 수는 없다. 진지한 사색의 결과이거나 개인공간에 자기감정을 표현한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박 연구원은 “과시적 허세든 지적 고뇌든 타인이 자신의 공간에서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명령할 권리는 없다”고 말했다.

그 안으로 두 발짝

기껏해야 실없는 허세나 부리는 온라인의 스노비즘을 뒤로하고 그 안으로 더 깊숙이 들어서면 오프라인의 또 다른 스노비즘이 나타난다. 수단이나 방법 따위를 가리지 않고 오로지 금전적인 이익에만 신경 쓰는 이들 또한 ‘속물’이다. 조한혜정 교수(사과대?문화인류)는 “사회의 최고 가치인 존경과 명예는 그 사회의 지속적인 단합과 협동을 가능케 했었다”며, “사회가 물질주의적으로 흐르고 존경과 명예가 깨지면서 결국 돈으로 서로를 비교하고 무시하고 뽐내는 체제가 만들어졌다”고 말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는 이 같은 물질추구적 스노비즘이 곳곳에서 목격된다. 속물에게 ‘돈’은 다른 무엇보다 우선시되는 일이다. 돈이 되기만 한다면 그리고 이왕이면 많은 돈을 긁어모을 수 있다면 속물들은 거리낌 없이 발을 담근다. 부동산, 주식, 외환 등 투기의 대상이 될 수 있는 모든 것에는 여지없이 속물들의 손길이 뻗친다. 탈세는 뛰어난 속물이 갖춰야 할 효과적인 기술이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각종 인맥을 동원하는 것도 필수다. 돈을 벌기 위해서는 약간의 양심도 약간의 체면도 잠시 잊고 접어둘 줄 알아야 한다.
속물들이 그렇게 악착같이 돈을 모으는 것도 결국 타인에게 과시하기 위한 과시욕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다. 속물들은 자기 본위로 돈을 쓰지 않는다. 그들의 생활은 전부 자신을 부럽게 쳐다볼 주변 사람들의 기호에 맞춰 돌아간다. 속물에게 ‘브랜드’는 편리하고 안전한 코스다. 옷, 자동차, 집 등 유형의 브랜드나 사는 지역, 학력, 직장 등 무형의 브랜드 모두 사람들은 알아서 그 브랜드의 가치를 알아보고 부러워해 준다. 그들에게 브랜드는 ‘속물 인생의 교과서’나 다름없다.
조한 교수는 한국사회에 물질추구적 스노비즘이 형성된 과정에 대해 “1990년대부터 소비문화가 급부상하고 경제적 부가 많아지면서 남에서부터 돈이 절대적 위치를 차지하는 문화가 형성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한국 스노비즘의 가장 큰 특징은 사회 지배층 사이에도 많은 속물들이 분포한다는 것이다. 19세기 영국 상류층이 스스로 천박해지는 것을 경계해서 스노비즘이 처음 생겨났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지금의 우리와는 상황이 많이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영국의 상류층은 반(反)스노비즘 지배층이었다. 그들은 스노비즘을 부끄럽게 여기며 직접 견제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한국 지배층은 오히려 속물이 되려고 애를 쓴다. 이 땅엔 스노비즘에 대한 사회적인 견제장치가 없다. 조한 교수는 “한국사회는 스노비즘의 만연을 넘어선 물질만능주의의 극치”라고 평가한다.

뒷길을 돌아 나오다

‘속물’의 한계는 분명하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선물상자의 포장만 기억할 뿐, 상자 안의 내용물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유(有)에서 유(有)를 베껴낼 수는 있어도 무(無)에서 유(有)를 만들어 낼 수는 없는 것이다. 조한 교수는 “스노비즘은 의미 있는 삶이나 의미 있는 관계를 갖지 못한 상황에서 나타날 수밖에 없는 소외현상”이라고 말했다. 아무런 롤모델도, 관객도 없는 별세계에 떨어진다면 그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남에게 과시하는 것 말고는 인생의 보람이 없다면 그만큼 불행한 인생이 없을 것이다. 그대, 혹시 ‘속물이 되라’는 문구에 혹했다면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김서홍 기자 leh@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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