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화인 고려하는 사회, 고려시대를 돌아보면 한국사회의 실마리가 보인다

지난 2007년 8월 국내체류 외국인 수가 100만 명을 넘어섰다. 우리나라 전체 인구 중 2%를 차지하는 규모다. 이런 사회 상황에 따라 국사교과서에서 지속적으로 강조돼왔던 ‘단일민족 교육’에 관해 논란이 일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우리나라가 오랜 시간동안 단일민족 혈통을 지켜왔고 최근에서야 상황이 변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 우리나라의 역사를 살펴보면 귀화인에 대한 다양한 기록들이 나타난다.
인도 아유타국 공주였던 허황옥은 가야의 김수로왕과 결혼해 김해 허씨의 시조가 됐고, 임진왜란 때 선봉장으로 출정했던 왜장 사야가(귀화명 김충선)는명분없는 전쟁에 대한 회의감과 조선의 문물을 향한 흠모 때문에 조선에 귀화해 조총기술을 전했다. 조선 말기에는 일본을 향하던 중 제주도에 표착한 네덜란드인 벨테브레(귀화명 박연)가 기록에 남은 최초의 서양 출신 귀화인이 되기도 했다. 위와 같은 유명 인물들 외에도 많은 외래 민족들이 우리나라에 정착해 후손을 퍼뜨렸다.

열 명 중 한명은 귀화인, 고려의 귀화인 역사

우리나라 역사를 통틀어 귀화인이 가장 많았던 시대는 고려시대다. 210만 명 정도의 고려 인구 중 적어도 10% 이상은 귀화인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개인단위의 귀화와 국제결혼을 통한 귀화가 흔한 지금과 달리 고려시대에는 가족단위, 집단단위로 이주해오는 귀화인들이 많았다.
고려 초기에는 중국 한족의 귀화가 많았는데, 귀화인들은 대개 상인들의 배를 타고 온 지식인들이었다. 당나라 멸망 이후 혼란스런 중국보다는 고려에서 출세의 기회가 클 것이라 생각한 중국 지식인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그렇게 귀화해 온 중국 지식인들 중 상당수가 관료로 발탁됐다. 대표적인 경우가 고려에 과거제도를 도입한 후주 출신의 귀화인 쌍기다.
고려 중기에는 여진, 거란 등 북방계통 민족으로부터의 귀화가 많았다. 이들은 집단적으로 이주해왔으며 여러 부류의 사람들로 구성됐다. 발해 멸망 후에는 대규모의 발해 유민들이 고려로 유입되기도 했다. 고려는 발해에 대해 같은 족속이라는 친밀감을 갖고 있었지만 실제 발해의 일반 백성들은 말갈을 비롯해 다양한 민족으로 이뤄져 있었다.
고려 후기에는 아라비아, 일본, 동남아 등에서 다양한 민족들이 소규모로 유입됐다. 이들은 특별한 목적을 지닌 사람들은 아니었으며 우연히 고려를 찾았다 정착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또 원나라가 후기 고려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던 만큼 원나라를 통해 고려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원나라가 패망한 후에는 고려에 와있던 원나라 관료 등이 그대로 눌러앉는 경우도 흔했다.

다문화사회 꽃피웠던 고려의 귀화 권장 정책

아주대학교 사학과 박옥걸 교수는 고려시대에 이처럼 다양한 귀화사례가 가능했던 것은 “고려가 개방적, 적극적, 진취적 태도로 문호를 열어두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고려 이전에는 사람들이 교류할 수 있는 여건이 미비해 정보가 부족했고, 조선시대에는 정책 자체가 고려에 비해 폐쇄적이었다”고 덧붙였다.
당시 고려는 동북아시아의 문화교류 중심지였고 국가 정책적으로 귀화인의 정착을 권장하고 있었다. 고려 정부는 귀화인들을 통해 새로운 제도, 문물, 기술 등을 수입해 적극적으로 활용하고자 했다. 제도의 경우 중국 지식인들의 활약이 두드러졌으며, 북방 민족은 모직기술과 군사, 국방적인 면에서 도움을 줬다. 고려 정부는 이들에게 관직과 직급을 내리고 다양한 편의를 제공했다.
그렇다고 특별한 기술이 없는 일반인의 귀화가 환영받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당시 사회에선 인구가 곧 국력이었고 인구가 많은 국가는 노동력과 세금, 군사력 등의 측면에서 이익을 볼 수 있었다. 고려 역시 귀화인들을 통한 국익향상을 모색했으며 이들이 고려에 빨리 적응하도록 집, 의복, 농토 등을 증여해주기도 했다.
문제는 귀화인이 원래 살던 나라와의 외교관계에서 발생했다. 귀화인을 받아들인 나라가 이익을 보는 만큼 귀화인이 떠나간 나라는 피해를 보기 때문이다. 발해 유민처럼 나라의 멸망이나 혼란 때문에 귀화해 온 사람은 상관없었지만, 중국 송나라의 지식인이나 외교관 등의 관료가 귀화를 원한다면 중국에 그 사실을 통보하고 합의를 봐야 했다.

귀화인의 자발적 토착화 이뤄내는 비결은

고려는 귀화인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포용함으로써 풍부한 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 현재 한국 사회를 당시 고려와 같은 상황으로 볼 수는 없지만, 귀화인들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 고려의 귀화인 역사는 하나의 참고사례가 될 만하다.
고려에서는 국가적으로 귀화인들에게 고려화될 것을 강제하지 않았다. 그러나 귀화인들은 시간이 지나며 점차 사는 곳에 토착화돼 갔다. 박 교수는 “대개 100년 정도 후 3~4대가 지나면 귀화인 출신을 구분하기 어려워졌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여기에는 고려로 온 귀화인의 대다수가 피부색이 비슷하고 문화적 차이가 크지 않았던 동북아시아계 출신들이었다는 점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귀화인들의 자발적 토착화를 이뤄낸 일차적 요인은 귀화인을 차별하지 않는 고려의 사회적 분위기였다. 현재 한국 사회는 귀화인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귀화인들은 동화가 아니라 이해의 대상으로 받아들여져야 할 것이다.

백지원 기자 kaleidoscope@yonsei.ac.kr

저작권자 © 연세춘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