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전종훈 대표사제

지난 6월 30일 시청 앞에는 생소한 광경이 펼쳐졌다. 흰 사제복을 입고 손에는 십자가를 든 한 무리의 사제들이 촛불문화제가 한창인 거리에 길고 흰 인간 띠를 만들며 등장했기 때문이다. 바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아래 사제단)의 ‘시국미사’였다.

사제단은 종교계의 사회 참여 흐름을 대표할 뿐 아니라 한국 민주화 운동 자체를 대표할만한 무게를 지니고 있다. 2008년 여름을 뜨겁게 지폈던 촛불정국에서도 세 차례에 걸친 시국미사를 통해 촛불문화제의 비폭력 평화 기조를 확고하게 정착시킴으로써 촛불을 일부 과격세력의 폭력 집회로 몰아가려던 정부의 허를 찔렀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 선봉에서 성명서를 읽어 내려가던 담담한 표정의 전종훈 대표사제(아래 전 사제)의 모습은 많은 이들의 뇌리에 남아있다.

50세가 넘으면 천명(天命)을 안다 했다. 의미 그대로 50세를 넘긴 그는 ‘하늘’의 뜻대로 살아가는 중이다. 전 사제는 노태우 정권 아래 있던 지난 1991년, 강경대 치사사건으로 대표되는 정부의 폭력진압 대항운동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사제단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정권이 바뀌면 괜찮아질 거라 생각했는데… 대학생이 맞아죽는 걸 보고 ‘이건 아니다’ 싶었다”고 말했다. 이후에도 국가보안법 철폐, 새만금 보호, 대추리 미군기지 이전 반대, 효순이, 미선이 사건 등 낮은 자의 목소리를 내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민주주의를 향한 사제의 행보

인터뷰에 앞서 사진을 찍겠다고 하자 전 사제의 얼굴엔 당혹스러워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천주교 사제로서 자주 언론에 노출되는 것에 대한 부담 때문이라고 했다. 종교인의 사회 참여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을 그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언론 자체는 사제단의 활동에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이 때문에 사람들이 활동의 목적을 정치적인 것으로 오해할까 두렵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사제단 활동의 목적은 무엇일까. 어렵지 않은 대답이 돌아왔다. 바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실현’이었다.

그는 “독재정권의 무자비한 탄압의 결과는 역설적이게도 훨씬 더 빨리 민주화를 앞당길 수 있었다”며 “진리는 탄압을 받으면 받을수록 더욱 확연히 드러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비단 7~80년대에 그치는 얘기가 아니다. 최근 사제단을 전국적으로 부각시켰던 촛불문화제에서의 활동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다. 전 사제는 “국민이 주인이라면서도 국민이 없는 세상인 양 행동하는 정부를 두고 볼 수 없었다”고 말했다. 특히 국민의 요구에 폭력적으로 대응하는 것을 보며 민주주의의 위기를 느꼈다 했다. 그는 언론에 대한 정부의 행동에도 비판의 칼날을 겨눴다. 국민의 입을 막으려는 정부는 결코 민주적일 수 없다. “신정부가 집권한지 반년이 지났지만 자기반성보다는 언론 탓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며 그는 “정책에 대한 고민보다는 언론 길들이기를 해결책으로 선택하는 우를 범했다”면서 아쉬움을 표했다.

그에게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위기를 가장 크게 느끼게 한 것은 바로 ‘국가보안법’의 존재였다. 그를 비롯한 30여명의 사제단은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해 23일 간의 단식을 단행했다. 이를 시작으로 여러 시민단체와 학생들의 참여가 더해지면서 운동은 힘을 키워갔다. 그렇게 보안법의 폐지가 현실이 되는가 싶더니 또 다시 정치권의 반발로 그 동안의 노력이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그는 “사제단의 활동 중 가장 안타까움이 컸다”며 “국가보안법 폐지는 ‘내용적 민주화’의 시금석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오늘을 마지막으로 사는 존재

사제는 신분상의 제약 때문에 ‘혼자’의 삶을 살 수밖에 없다. 피붙이로서의 가족과 떨어지는 대신 세상 모든 이를 가족으로 얻는다. 외로운 삶이지만 그 자유로움 때문에 세상과 맞서는 두려움이 줄었다. 그는 “사제는 오늘을 마지막으로 살아야 하는 존재”라며 “그것이 십자가의 삶이다”라고 말했다. 지난 2007년 김용철 변호사와 함께 ‘삼성 비자금’을 폭로했을 때는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이 그들이 싸워야 하는 대상이었다. 누구도 거대권력의 비리에 대해 입을 열지 못했다. 알아도 모른 척, 모르는 게 약인 척 했다. 7~80년대와 같이 ‘가시적인 적’이 사라진 지금의 현실에서는 모른 척해도 ‘살만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는 용기를 잃지 않았다. 그가 남보다 능력 있고 힘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것이 사제의 존재 이유이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하느님의 일이고,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은 사제의 의무”라면서 “숨이 붙어있는 한 행동 하겠다”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누구도 꺾지 못할 의지가 서려있었다. 평범한 사제의 길 대신 굴곡지고 험난한 삶을 선택했지만 그는 행복한 사제다. 힘들수록, 탄압 받을수록 예수님의 길과 닮는다. “진리를 외치다가 죽을 수 있다면 사제로서 최고의 영광”이라며 웃는 전 사제의 얼굴은 예수의 그것과 닮아있었다.

시대의 요청을 외면하지 말라

전 사제는 이번 촛불문화제에서 대학생보다는 중·고생들의 활동이 두드러졌던 것을 지적하며 “시대의 요청을 외면하지 말라”는 당부의 말을 전했다. 그는 “과거 민주화를 이루는 데 대학생이 특히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처럼 그들은 이 시대의 ‘횃불’이 돼야한다”고 말했다. 무작정 ‘투쟁’을 하라는 게 아니다. ‘개인’으로 살지 말고 ‘더불어’ 사는 삶을 살자는 것이다. “삶에 대한 가치관을 바꾸면 세상이 달리 보이고, 그럼 내가 뭘 해야 할지 보인다. 그것은 때로 투쟁이 되기도, 공부가 되기도 한다. 그때가 돼야 삶의 가치를 알게 될 것”이라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인터뷰 내내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사회, 더불어 사는 행복한 사회에 대한 전 사제의 바람이 느껴졌다. 그러나 지난 8월 21일 전 사제는 서울대교구로부터 갑작스런 안식년 발령을 받아 잠시 사제로서의 활동을 중단하게 됐다. 전 사제의 근무지였던 ‘수락산 성당’에 발령 받은 지 18개월 만에 자리를 떠나게 된 것은 통상적으로 한 교구에서 4~5년 동안 근무하는 것에 비하면 매우 이례적이다. 전 사제는 “주교님께 순명을 서약한 사람으로서 결정에 따를 수밖에 없다”고 의연히 말했지만 마지막 미사 때는 아쉬움에 눈물을 보였다.

그는 “사제는 모든 사람들의 마지막이 돼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며 모두가 만류했던 삼성의 비리를 폭로했던 김용철 변호사의 곁에도 사제단이 있었다. 당시 김 변호사가 삼성의 회계자료를 갖고 여러 방송사와 변호사들을 찾아다니며 힘이 돼줄 것을 요청했지만 어느 누구도 대한민국 최대의 기업에 맞서려 하지 않았다. 결국 김 변호사가 ‘최후의 보루’로 찾아간 것은 바로 전종훈 사제였다. 그에게 있어 전 사제는 마지막 희망이었다. 창세기18장 32절에서 하느님은 아브라함과의 대화를 통해 타락한 곳에 의인 10명만 있어도 그 10명을 위해 그 곳을 멸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다. 정의구현을 위해 노력하는 전종훈 대표사제와 사제단이 있는 한 우리 사회의 ‘마지막 희망’은 여전히 건재하다.

김선효 기자 say_hello@
사진 박소영 기자 behapp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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