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림 이옥남

각자의 취향에 따라 듣는 음악도 천차만별인 시대다. 이런 세상에 ‘대학생들의 음악’이라는 말은 어설프게 들린다. 하지만, 있었다. 지금은 멀어진 1970년대의 모던포크가 그랬다.

‘통기타, 장발, 티셔츠에 청바지’. 한때 모던포크를 즐기는 ‘앞서가는’ 대학생들의 이미지였다. 이제 그것들은 촌스러움의 상징으로 전락했다. 온갖 음향효과와 창법이 난무하는 음악에 익숙한 21세기 대학생의 귀에는 통기타의 단출한 반주와 꾸밈없는 목소리가 촌스러울 법도 하다. 그러나 70년대 젊은이들이 사랑했던 것은 기교가 아닌 가사 속의 ‘포크정신’이었다.

포크정신이란 무엇일까? 누군가는 저항을, 누군가는 자유를 말한다. 낭만을 노래하는 사람도, 성찰을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다. 누구도 ‘포크정신은 이렇다’고 딱 잘라 제시하지는 못한다. 그만큼 포크는 가수들의 개성에 따라, 타 장르와의 조합에 따라, 또 시대의 흐름에 따라 다양하게 변주된다.

1960년대 말까지 한국 포크음악은 외국노래를 번안해 부르는 수준에 그쳤다. 이 단계에서 독립적인 ‘모던포크’로 발돋움하기 위해선 직접 곡을 짓고 포크정신이 담긴 가사를 붙여 노래하는 창작력 있는 가수가 필요했다. 때는 1971년, 김민기가 그 첫 발을 내딛었다. ‘아하 누가 푸른 하늘 보여주면 좋겠네…’ 직접 쓴 노래로 이뤄진 김민기의 1집 앨범이 발표됐을 때, 사람들은 그의 노래에서 비판과 풍자를 읽었다. ‘번안’과 ‘사랑타령’이라는 기성음악의 공식에 갇히지 않고 자신만의 자유로운 노래를 펼친  김민기는 포크계에 신선한 충격을 안겼다. 이후 한국 포크가 여러 갈래로 가지를 뻗을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셈이다.

한창 전성기를 누리던 포크음악은 1974년 1월 유신정부의 ‘긴급조치 1호’와 맞닥뜨린다. 반체제적 의도가 의심되는 노래들이 일제히 금지곡이 됐다. 이어 1975년 12월에는 ‘대마초 파동’이 일어났다. 히피문화의 여파로 공공연히 대마초를 흡연하던 포크가수들이 줄줄이 마약사범으로 연행됐다. 국가에 의해 퇴폐적 이미지로 낙인찍힌 포크계는 대중과 거리가 멀어졌다.

포크음악이 비틀대던 1979년, 조동진은 음악활동 10년만의 ‘첫 앨범’을 발표한다. 이 앨범에서 과거의 모던포크를 재구성한 그는 읊조리듯 노래하며 내면으로 파고드는 특유의 음악세계를 펼쳐 80년대 포크를 이끌었다. 이때부터 포크는 조금씩 변화했다. 가수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활동하는 이른바 ‘언더그라운드 음악’으로의 이행이었다.

1990년대 들어 포크음악은 겨우 명맥만 유지하는 형편이었다. 그때 김광석이 등장했다. 그는 70년대의 저항성과 80년대의 서정성을 두루 아울렀다. 리메이크 앨범『다시 부르기 1,2』를 통해 모던포크의 계보를 잇는 모습을 보이는가 하면, 기존 포크의 틀에서 벗어나 인생의 모든 면면을 경계 없이 노래하기도 했다. 그는 소극장 공연과 라디오를 통해 사람들과 소통했다. 다분히 언더그라운드적인 통로였지만 웬만한 주류 가수 못지않은 팬을 끌어당겼다. 김광석은 포크가 메말랐던 90년대 음악계에 홀로 우뚝 섰다 사라진 특별한 존재다.

김광석이 세상을 떠난 1996년 1월 이후 포크는 좀처럼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70~80년대 독재시대를 지나 저항의 목소리는 호소력을 잃고 90년대 서태지 핵폭풍을 거치며 통기타와 하모니카의 소박한 연주는 흡인력을 잃었다. 모던포크가 주류문화로 복귀하기엔 그 입지가 너무 좁아졌다.

하지만 김광석에 대한 관심은 그가 떠난 뒤에도 줄지 않았다. 지난 1월 6일 김광석 12주기에, 대학로 학전 블루 소극장 앞에는 김광석 노래비가 세워졌다. 사람들은 그를 그리며 한때 대학가 구석구석을 울렸던 ‘가볍지 않은 노래’를 추억한다. 이제는 무대를 지키는 포크가수가 많지 않지만 사람들은 아직도 김민기를 듣고 조동진을 기억하고 김광석을 부른다. 그것은 그들의 묵직한 노랫말이 시대를 넘어 결국 우리 삶 자체와 공명하기 때문이다.


글 김서홍 기자 leh@
 그림 이옥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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