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상님들의 지혜가 필요한 여름철이다.

“나물 먹고 배불러서 손으로 배를 문지르고 얇은 오사모를 뒤로 제껴 쓰고, 용죽장 손에 집고 돌 위에 앉아서 두 다리 드러내어 발을 담근다.

 그 시원한 물을 입에 머금고 쭉 뿜어내면 불같은 더위가 저만치 도망을 가고 먼지 묻은 갓끈도 씻어낸다. 휘파람 불며 돌아와 시냇바람 설렁설렁하면 여덟자 대자리에 나무베개를 베고 눕는다…”


이는 고려 후기 문인 이인로(李仁老, 1152~1220)의 「탁족부」라는 글이다. 태양빛이 내리쬐는 여름날, 더위를 쫓아 보내고자 나무가 드리운 시냇가에 모습을 드러낸 선비의 모습이 떠오른다. ‘불같은 더위’라는 표현에서 옛날에도 여름 더위는 오늘날 못지않았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그런 더운 여름날, 우리 조상들은 어떤 풍경을 그리고 있었을까?

오늘날 우리가 선풍기, 에어컨 등을 피서도구로 이용하는 것처럼 조상들은 죽부인, 등등거리, 평상, 부채 등을 피서 도구로 이용했다. 여름밤에 안고 자면 땀이 차는 것을 방지하고 바람도 통해 시원했다는 죽부인은 조상들이 애용하던 대표적인 피서도구다. 등등거리 역시 죽부인만큼 더위를 쫓는데 널리 쓰였다. 조끼모양의 대나무 세공품인 등등거리는 옷 아래 입어 옷에 땀이 차지 않도록 하고 통풍이 잘 되도록 고안됐다. 이와 같이 대부분의 피서도구는 대나무로 만들어졌다. 대나무는 열전도율이 높아 사람이 내보내는 열이 대나무 세공품으로 빠르게 이동하기 때문이다. 이런 특성 덕에 대나무 세공품을 지닌 사람은 시원함을 느낄 수 있다.

최근에는 여름 명절로 ‘삼복(초복, 중복, 말복)’ 정도만 지내고 있지만 옛날에는 단오, 유두, 등의 여름 명절을 잊지 않고 보냈다. 음력 5월 초닷샛날인 ‘단오(端午)’는 여름이 시작될 즘으로, 1년 중 양기가 가장 강한 날로 여겨졌다. 이 날은 잘 알려진 대로 창포 삶은 물에 머리를 감고 그네뛰기와 씨름 등의 놀이를 즐겼다. 또한 이 날 궁중에서는 임금에게 ‘제호탕(醍瑚湯)’과 ‘옥추단(玉樞丹)’을 올렸다. 제호탕은 한약재를 꿀에 섞어 달 인 약으로 더위가 심한 여름철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일종의 청량음료였으며, 옥추단은 여름철 몸이 차가워졌을 때 생기는 질병인 곽란*(?亂)을 치료하기 위한 약이었다. 단오에는 여름철 피서 도구인 부채를 선물하는 풍습도 있었다. 단오에 선물하는 부채에는 더위를 식히는 것은 물론 질병을 물리치길 바라는 바람도 들어있었다. ‘유두(流頭)’는 음력 6월 보름으로 한창 더울 때다. 유두에 조상들은 오늘날 우리가 계곡이나 바다로 휴가를 떠나는 것처럼 ‘물맞이’ 풍속을 지냈다. 물 맑은 계곡, 폭포 등을 찾아 물을 맞아 더위를 쫓거나 부정을 씻어낸다는 의미를 담아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았다.

 이인로가 「탁족부」에서 노래한 ‘탁족놀이’는 유두의 물맞이 놀이처럼 더위를 물로 식히기 위한 피서 방법이다. 탁족놀이는 글자 그대로 여름철에 산수가 좋을 곳을 찾아 발을 물에 담그고 풍경을 즐기던 풍습이다. 체면을 중시해 함부로 옷을 벗고 물을 즐기지 못했던 양반이나 선비들도 탁족놀이를 하며 부담 없이 더위를 잊을 수 있었다. 이 외에도 모래찜질로 이열치열(以熱治熱)을 하거나 찬 물로 등목을 하는 등 오늘날에도 볼 수 있는 피서법이 있었다.

  고유가시대, 에어컨을 켜거나 냉장고 문을 여닫는 것이 부담스러운 때다. 이런 때에 에어컨을 끄고 ‘실내탁족놀이’를 즐겨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대야에 받아 놓은 차가운 물속에 발을 담가 보자. 비싼 전기세 대신 저만치 물러선 더위 사이로 옛 조상들의 정취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곽란: 한의학 병명으로 찬 기운이 몸에 스몄을 때 두통이 일거나 구토, 설사 등을 일으키는 질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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