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달을 넘게 타오르는 촛불이 여태 꺼지지 않고 있다. 건강한 사회라면 마땅히 그 안에 갈등과 반목이 있기 마련이다. 무덤 속의 평화나 공동묘지의 적막을 원하지 않는 한 갈등은 드러내어 공론화 과정을 통해 조정되고 해소돼야 한다. 집회로 인해 빚어지는 작고 큰 소란을 탓할 일이 아니다. 혼란이 싫다고 독재와 강요된 침묵을 택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헌법은 집회의 자유를 기본권으로 보장하고 있다. 민주정치체제 이외의 다른 경쟁적인 정치체제들이 존재해왔음에도 민주정은 그리스 아테네 이후에도 수천 년 동안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민주정이 전세계 국가들에서 통용되는 데에는, 그것이 가지는 중우정치의 취약성에도 불구하고 독재를 방지하기에 가장 효과적인 체제이기 때문이다.

집회, 특히 공직자와 공직자의 결정을 비판하는 집회는 주기적으로 치러지는 선거와 마찬가지로 민주주의에서 주권적 시민들의 축제이다. 프랑스의 과학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에 따르면 축제의 신호는 언제나 마찰에 의한 불의 생산과 연결된다고 한다. 그러니 집회라 하는 민주주의의 축제에 불이 붙지 않으면 뭔가 아쉬울 것이다. 그렇다면 화려한 불꽃놀이보다 작은 초들이 모여 불을 밝히는 집회는 얼마나 소담하고 아름다운 집회인 것인가. 그것이 바로 촛불의 미학이다.

사회의 민주화 과정에서 빚어지는 부득이한 성장통을 간단히 얼마의 돈으로 환원할 수는 없다. 노동현장에서 파업이 벌어질 때면 정부와 언론은 늘 이로 인한 천문학적인 숫자의 손실액을 써대기에 급급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당 기업이 연말이면 엄청난 흑자의 영업이익을 발표하는 것은 기이한 일이다. 그 손실액을 파업이 있기 전에 미리 노동자들에게 임금으로 주었다면 얼마나 더 좋았을까하는 안타까움이 든다.

단지 미국 쇠고기가 문제가 아니다. 촛불 자체가 문제인 것은 더욱 아니다. 모든 국가권력에게 가장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은 먹고사는 경제이다. 대체로 인간은 만족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지난 정권 동안에 권력을 빼앗긴 이들과 보수언론이 이를 이슈로 삼아 금기의 도를 넘어서 권력을 세차게 몰아세웠고, 이로써 다른 많은 허물에도 불구하고 재집권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경부대운하 추진, 영어몰입교육 및 의료민영화 논의, 복지예산 감축 및 고소영·강부자로 조소되는 내각 구성 등에서 좌절한 민초들이 다시 촛불을 태우고 있다. 어떤 이에게는 뒤늦은 반성과 후회의 촛불이기도 할 것이다.

주권자와 그로부터 한시적으로 권력을 위탁받은 자 사이의 ‘소통의 부재’가 문제였음이 연이은 촛불집회를 통해 공히 수긍됐고, 최고 권력자가 집 뒷산에서 실낱 같은 촛불들이 불야성을 이룬 밤거리를 내려다보며 많은 반성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촛불에 재가 뿌려지고 있다. 불과 얼마 전에 권력을 맡겨달라고, 성실한 머슴이 되겠다고 애걸하던 이들이 그 때와 같은 사람들에게 매질을 하고 있다. 루소의 말대로 대의제민주주의에서 주권자는 진정 투표일에만 자유로운 것인가.

분명히 스스로를 태워 어둠을 밝히는 촛불로 끝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촛불이 들불로 번져 다른 성한 것들을 태울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니 우리 모두는 촛불에 담긴 민의에 두려움과 경외심을 가져야 한다.
재를 뿌려 촛불을 끄려하기 보다 권력자 자신이 스스로 촛불이 되고, 안도현 시인이 노래하듯 자신을 버리고 한 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 하얀 연탄이 되어 주기를 간절히 기다려 본다. 그래야 보이는 촛불도, 마음속의 촛불도 말없이 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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