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만화가 장봉군 화백

‘오늘은 또 뭘 그릴까?’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나의 고민은 변함이 없다. 하루 한 컷. 더도 덜도 말고 딱 그림 한 컷이면 끝난다. 그림 한 장에 나의 하루가 열리고, 하루가 닫힌다. (중략) 내용과 아이디어가 단번에 떠올라 획기적인 만평을 그리는 날은 1년에 고작 하루, 이틀밖에 안 된다. 그런 신기(神技)에 가까운 재주를 부리는 것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 나머지 날들은 그저 부단한 노력을 쏟아 부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늘 스트레스의 연속이다. 아침 10시 편집회의와 오후 2시 편집회의에 참석하고 다음 날 만평으로 무엇을 그릴까 고민하다 오후 3~4시쯤부터 아이디어를 짜내어 오후 5시 무렵에 그림을 넘기기까지, 나의 등줄기로 하루 종일 서늘한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아마 내 눈은 더 깊어지고 세상 보는 지혜가 더 넓어져야 그 식은땀도 마를 것이다. 

- 「만화가가 말하는 만화가」 중에서

“사회 변혁에 일조하고 싶어 매일 투고해

「한겨레」시사 만평을 맡게 된 건 행운

 잘하는 일로 사회를 바꿀 수 있어 행복

 만화로 하고 싶은 마음껏 하고 싶어

 진실이 왜곡될수록 만평은 신랄해질 것 ”

 

▲ 김영아 기자 imstaring@yonsei.ac.kr

 

신문을 다 볼 시간이 없다면, 주저 말고 첫 장을 넘겨보자. 신문 2면 아래쪽에 위치한 시사만평은 그림 한 컷으로 들려주는 신문의 목소리다. 그뿐 아니라 해당 신문사의 논조를 아는 데 있어 만평을 살펴보는 것만큼 쉬운 방법도 없다. 시사만평은 그 신문의 역사와 맥을 같이 하기 때문이다. 풍자와 촌철살인의 미학은 만평이 지닌 가장 큰 매력이다. 권력자들에겐 쓰디쓴 약인 동시에, 독자들에겐 냉수 같던 「한겨레」 만평의 역사가 지금 어떤 이의 붓 끝에서 화룡점정(畵龍點睛)을 꿈꾸고 있을까. 누가 그 뒤를 이어도 좋은 소리 못들을 것 같았던 ‘한겨레의 간판’ 박재동 화백의 붓을 받아 날카로운 풍자와 예리한 감각으로 호평 받고 있는 장봉군 화백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사회의 크고 작은 사건들을 손바닥 정도의 넓이에 담아 내는 작업은 무척이나 고민스럽지만,  오늘도 만평을 그리고 있는 그를 만났다.

만화 인생에 「한겨레」라는 방점을 찍다

벌써 10년째 ‘한겨레 그림판’을 맡고 있는 그는 지난 1992년부터 시사만화가 활동을 시작했다. 「한겨레」에 독자만화를 매일 거르지 않고 투고하다 박재동 화백으로부터 일주일에 한 번씩 그려보라는 제안을 받았다. 그리고 지난 1996년에 「문화일보」에서 처음으로 매일 시사만평을 그리다가 98년 「한겨레」로 돌아왔다. “처음엔 지역 운동단체 회지에 숨은 그림 찾기가 가미된 만평을 그리는 일로 만화를 시작했어요. ‘독자초대석’이긴 하지만 「한겨레」에서 일하다가, 운 좋게 전속화백으로 「문화일보」에 갔죠. 근데 간섭이 심했어요. 너무 ‘한겨레적’이라는 거예요. 아예 만평을 빼버리는 경우도 있었고요. 그러다보니 좀 조심스러워졌죠. 그러던 차에 「미디어 오늘」 김종배 기자가 어떻게 알아차렸는지 내가 몸 사린다고 적나라하게 ‘씹어’ 놨더라고요. 안 되겠다 싶어서 대차게 부딪혀가며 그렸어요. 편집국장과 마찰이 심해져 다시 「한겨레」로 오게 됐죠.”

예술가의 붓과 저널리스트의 가슴으로

그는 그 덕분에 「문화일보」에 재직하던 지난 1997년 시사만화가 최초로 기자협회 선정 ‘이달의 기자상’을 수상함으로써 만평이 기사 이상의 호소력을 가질 수 있음을 증명했다. 그의 만평은 깊이 있는 철학으로부터 느껴지는 무게감이 있었고 기사가 내지 못한 목소리를 날카롭게 풍자할 줄 알았다. “예전엔 나쁜 ‘놈’, 좋은 ‘놈’이 명확했기 때문에 나쁜 ‘놈’에게 칼을 들이대면 됐지만 지금은 시각의 스펙트럼이 다양해요. ‘어떤 입장에서 그릴 것인가’의 문제가 중요해졌죠. 기사는 긴 글 안에서 적당히 얼버무릴 수 있는데 만평은 작가의 시각이 온전히 드러날 수밖에 없어요. 사건의 딱 한 단면만을 얘기해야 하니까요. 그러면서도 그 상징적인 단면이 사건의 전체의미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하고, 한 컷에 다 보여줘야 하니까 제 시각이 노출될 수밖에 없죠. 그만큼 책임감도 느껴요.”

만평은 기사보다 절제의 미학이 필요하다. 한 장의 그림으로 백 마디 이상을 보여줘야 하는 특성상 기승전결의 묘미를 살릴 수가 없는데다 그 안에서 내용을 한번 비틀어야 한다. 단 한 컷에 메시지와 풍자, 해학, 비판까지 담아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만평에서 구구한 설명을 요구하지 않는다. “‘척 보면 느낌이 오는’ 그림이어야 하기 때문에 군더더기가 있으면 안돼요. 한 방에 ‘어필’할 수 있는 아이디어가 없으면 도루묵이거든요. 언론기능도 크지만 만평은 신문의 양념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만화적인 재미, 비주얼같이 예술적인 부분도 고려해야 해요. 그래서 만화가와 언론인 중간 지점에 있는 게 바로 시사만평가예요.”

먹물로 그려내는 현실

한국 시사만화가 탄생한지 올해로 99주년이 됐다. 그간 한국 시사만화는 오랜 역사만큼이나 수많은 수난을 겪어왔다. 권력을 조롱했다는 이유로 만화가들이 구속되기도 했다. 왜 시사만화가들은 이런 위험한 상황 속에서도 그 붓끝의 날카로움을 거두지 못하는 것일까? “권위주의 정권시절에는 검열이 굉장히 심했어요. 일부러 서너 개를 그리게 해서 그 중에 한 개를 골라 통과시키기도 했고 민감한 사안은 화백이 알아서 피해 그리기도 했어요.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표현의 자유가 굉장히 넓어졌다고 봐야죠. 그래도 여전히 편집권 침해는 남아있어요. 최근에도 「부산일보」의 손문상 화백, 「문화일보」의 이재용 화백, 전 「세계일보」의 조민성 화백이 신문사를 떠났어요. 신문의 구조적 보수성은 잘 변하지 않는 것 같아요. 그렇지만 굽힐 수야 있나요?” 단호한 그의 말에서 하루의 ‘역사’를 그려내는 언론인으로서의 의지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역사’를 그리는 일이기에 만평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녹록치 않다. 마감은 낮 5시. 목에 칼이 들어오는 낮 3시가 되면 몸에 열이 나고 신경이 곤두선다. 인터넷으로 실시간 뉴스를 검색하고, 메신저를 켜놓고 타신문 화백들과 정보를 교환한다. 이렇게 촌각을 다투는 마감의 긴박감 속에서도 마지막 한 획을 망설이게 하는 순간은 있지 않을까? “끝까지 고민하다가 막판에 수정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 결정이 약이 돼서 독자들에게 큰 호응을 얻는 때도 있어요. 작은 요소에 따라 전체적인 효과가 좌우되니까요.”

사회 흐름에 누구보다 민감한 촉수를 지녀야 하는 시사만화가에게 뉴스는 뗄 수 없는 존재다. 집에서도 줄곧 컴퓨터 앞에 앉아 실시간 뉴스를 확인해야 마음이 놓인단다. 자신을 만평에 등장시킨다면 어떤 모습일 것 같냐는 질문에 그는 “머릿속이 복잡한 가분수 형의 캐릭터일 거예요. 항상 인터넷 앞에서 뉴스를 확인하고 있지 않을까요?”라며 웃었다.

사실 그의 본명은 김주성이다. 본명이라면 신기했을 독특한 필명은 대체 무슨 뜻에서 붙여진 걸까? 장봉군은 ‘장 봉군’이 아니라 ‘장봉 군’으로 읽는 게 맞단다. ‘장봉(藏鋒)’은 서예 필법인데 여기에 놈 군(君)자를 붙인 것이다. 획을 그을 때 붓을 세워 그 끝이 획의 정 중앙에 있어야 한다는 기본적 필법으로 이를 유지하지 못하면 어떠한 변화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다는 심오한 의미가 숨어있다. 앞으로도 그의 붓이 꼿꼿한 ‘장봉’의 정신으로 독자들의 속을 시원케 하는 만평들을 그려내 주길 기대해 본다.

▲ 제 17대 대통령 선거 당시 화제가 됐던 장봉군 화백의 만평 자료사진 장봉군,「한겨레」

저작권자 © 연세춘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