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촌 한옥촌에 위치한 아담한 가회민화박물관의 전경
따뜻한 봄기운에 절로 졸음이 오는 오후. 설레는 발걸음으로 시작해 지하 미로 같은 안국역을 빠져 나오면 탁 트인 하늘과 마주하게 된다. 흥에 겨워 걸음을 재촉하다가 북촌 한옥마을에 이르면 기와지붕의 능선에 흠뻑 취한다.  실가지 같은 골목길로 들어서 산보하는 기분으로 걷기를 몇 분. 빽빽한 기와집 사이 정겨운 대문이 보이면 그곳이 바로 아담한 가회 박물관이다.

가회 박물관은 일반 한옥 집과 생김새가 똑같아서 작품들이 전시돼있다기보다는 집의 한 부분처럼 느껴진다. 창호지 곱게 바른 문을 열고 안방쯤 되어 보이는 아담한 전시실 문을 열면 갖가지 ‘꿈꾸는 우리 민화’들이 손님을 반기듯 수줍게 모습을 드러낸다.

민화는 서민들에 의해 그려져 소박하지만 자유롭고 독특한 필치를 지니는 그림이다. 여기에는 보통의 회화에서 나타나는 작가 개인의 생각이나 서정보다 과거 동시대의 보편적인 생활과 감수성이 녹아있다. 민화는 이전의 틀을 그대로 따르면서 내용과 표현기법만 바뀌는 ‘뽄그림(본 떠 그린 그림이라는 말을 축약한 것)’이기 때문에 회화의 범위보다는 공예의 범위에 속한다고 한다. 때문에 비슷한 종류의 민화끼리는 그 구성이나 등장소재가 거의 동일하다. 그림 안에 그려지는 대상들은 하나의 기호로 각각 의미하는 바를 지닌다.

화조도(花鳥圖)는 이러한 민화의 특징을 잘 드러낸다. 일반적으로 원앙은 부부간 금슬과 귀한 자식을, 학은 장수와 입신출세를 상징하고 모란은 부귀영화를, 소나무는 장수를 상징하는 등 저마다 고유의 의미를 지닌다. 가회박물관에는 화조도 총 네 점이 전시돼있고 이 중 두 점은 병풍이다. 화조도 병풍의 첫 폭에 그려진 송학을 시작으로 여덟 폭의 각 면에서는 다양한 새들이 꽃과 어울려 종이 위에서 날아다니고 지저귄다. 그림 네 점이 모두 구성면에서는 거의 흡사하나 색감 등에서 차이를 두어 다채롭다. 화조도 병풍은 대체로 혼례 행사나 혼방에 쓰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림 속의 꽃과 새는 정해진 궁합에 따라 조합되어 나타나며 특별히 새는 대부분 한 쌍을 그린다. 화려한 꽃과 그 위를 노니는 새들을 바라보며 금슬 좋게 한평생을 보내고자 다짐했던 신랑신부의 마음이 전해진다.

영수화(靈獸畵)의 단골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호랑이의 개성 있는 모습을 보면 누구라도 웃음 짓게 된다. 까마귀 울음소리에 놀라 눈이 동그래진 호랑이부터 처진 눈으로 그림 밖을 향해 씨익 웃는 호랑이까지 표정만도 수백 가지다. 중국과 일본 민화에 흔히 등장하는 무섭고 잔혹한 이미지의 호랑이와는 달리 한반도 호랑이는 귀엽고 친근하다. 두려운 존재인 호랑이마저 친구로 바꾼 우리 조상들의 재치가 민화에서 묻어나온다.
전시된 작품 중 가장 도드라진 작품은 포도덩굴이 이리저리 흐드러져 있는 모습을 그린 민화다. 먹의 농담으로 굵게 또는 가늘게 표현된 줄기는 민화가 ‘서투른 그림’이라고 생각했던 뭇 사람들의 생각을 무너뜨린다. 전문적인 미술교육도 받지 않은 일반 민중들이 그린 그림이라는 사실이 되레 놀랍게 다가온다. 그림을 그릴 때 방안에 걸면 향이 퍼지도록 포도즙을 직접 먹에 섞기도 했다는 해설자의 설명을 듣자마자, 그림에서 포도향이 번져나오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단순히 빈 벽을 아름답게 채우는 것을 넘어 그림 속과 현실을 연결시키는 민화의 특출난 능력이다.

가회박물관은 민화뿐만 아니라 부적, 민속 공예품 등 다양한 전통적 작품들을 전시한다. 그림과 공예품들 곳곳에서 튀어나오는 서민들의 고유한 정취는 보는 이를 즐거움에 배부르게 한다. 보는 이와 함께 담소하는 해설자의 친절한 설명과 관람 후 제공되는 따뜻한 녹차는 후한 덤이다. 고즈넉한 전통마을의 분위기와 함께 민화가 들려주는 익살스러운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당장 기와담장 너머를 기웃거리자.                     

글 김규진 기자loveme@

자료사진 가회민화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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