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 맹자, 노자 등 동양 철학의 대가들은 우리에게 동양고전 보다는 ‘논술학원’을 떠올리게 한다. 논술시험에 대비하기 위해 발췌독이라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의 요약본을 열심히 읽었지만 거기서 끝이었으니 ‘논술학원’ 이 떠오르지 않고 무엇이 떠오르랴. 더구나 학문의 상아탑이라는 대학에 들어와서는 플라톤, 스피노자, 니체 등 서양 철학의 대가들에 집중된 교육을 받다보니 동양 사상가들은 더욱 밀려날 수 밖에 없었다.

우리가 배우는 학문의 뿌리가 서양사상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지만, 학문의 다양성 측면에서 볼 때 서양사상에 치우친 수업은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 우리는 학문을 배우면서 진리를 찾는다. 하지만 서양학문만으로 진리를 찾을 수 있었다면 이미 세상엔 단 하나의 진리만 존재하지 않았을까?

▲ 우리는 서양학문에 치우친 교육을 받고 있다. 일러스트레이션 남아름

비중 없는 동양 고전

동양 사상이 담긴 고전이 주목받지 못하는 문제는 수업 커리큘럼에서도 드러난다. 2008년 1학기 우리대학교 책읽기 수업으로 대표되는 ‘독서와 토론’ 은 총 7개가 개설됐다. (폐강 과목, 같은 교수 수업 제외) 그 중 동양 고전을 중점으로 하는 수업은 단 하나에 불과했다. 대부분의 수업에서 서양 고전이 반 이상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명저읽기’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연세필독도서’의 경우, ‘철학 심리학 종교 언어 예술’ 분야는 동양 고전이 적절한 비율을 유지하고 있는데 반해 아쉽게도 ‘사회과학’ 분류에는 단 한 권 뿐이다. 우리대학교 양진석(신방·07)씨는 “동양의 고전을 제대로 공부하고 싶어도 양질의 수업이나 정보가 없다”며 서양 학문에 치우친 대학 수업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동양 고전의 부재 이유

대학교에서 동양 고전이 소외받는 이유에 대해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윤재근 명예교수는 “인문학의 뿌리가 왜곡됐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우리나라는 일본을 통해 인문학을 받아들였는데, 일본은 서양으로부터 인문학을 받아들였다. 결국 ‘우리의’ 인문학이 아닌 ‘서양의’ 인문학이었던 셈이다. 해외 유학파 출신의 교육자들이 동양 학문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것도 한 원인이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윤 교수가 90년에 집필한 『학의 다리가 길다고 자르지 마라』가 베스트셀러를 기록하면서 동양 고전의 대중화를 마련하게 됐다.

한국고전번역원 박석무 원장은 동양 고전이 읽히지 않는 이유를 한문 교육의 부재로 꼽았다. 해방을 기준으로 지금의 교육과학기술부인 문교부가 기존에 있었던 한문 교육 시간을 대폭 줄이고 한글 교육에 시간을 투자하는 정책을 펼쳤다. 때문에 일주일에 한 시간 뿐인 한문 교육은 한문이 점점 잊혀져 가는 데 한 몫 하게 됐다. 한문이 잊혀지니 한문으로 기록된 동양고전에 대한 관심도 지레 사라져버렸다. 박 원장은 “61학번인 내가 학교에 들어갔을 때도 한문으로 된 고전들이 쌓인 서고에는 먼지가 수북했다”며 “한문에 거리감을 느끼지 않았던 그 무렵에도 그랬으니 지금 동양 고전이 읽히지 않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기반이 마련된 상태에서도 아무 것도 하지 않는데, 그 기반마저 없는 상황에서 어떤 성과물이나 결과를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고전이 읽힐 수 있도록

고전은 현대인에게 생소한 한문으로 기록돼 있기 때문에 고전의 대중화를 위해서는 번역이 중요한 기반이 된다. 고전 번역은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첫 번째는 학문적 번역이다. 특수한 용어들을 주석으로 설명하거나 방점을 찍어주는 식이다. 이런 작업은 연구자들이 빠르고 정확한 연구를 하는 데 도움을 준다. 

두 번째는 대중적 번역이다. 서고의 먼지 속에 파묻힌 고전이 되지 않기 위해선 밖으로 나와 빛을 보고 대중에게 선보여야 한다. 한국고전번역원에서는 우리나라의 고전을 번역해 대중들이 좀더 쉽게 접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박 원장은 “기존 번역서의 딱딱하고 빽빽한 편집 대신 여백을 넉넉하게 주는 등 대중들의 가독성을 높이려 하고 있다”며 고전의 대중화에 큰 힘을 쏟고 있음을 밝혔다.

고전이 읽히기 위해서는 번역 과정 뿐만 아니라 ‘책’으로 엮어지는 과정도 필요하다. 동양 관련 저서들을 많이 출판하고 있는 도서출판 예문서원 대표 오정혜씨는 “책이 팔리지는 않더라도 누군가는 책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의무감에 동양 서적 출판을 계속하고 있다”며  “직접 책을 기획하거나 좋은 저자를 섭외하는 등 다양한 방식을 통해 동양 관련 서적을 꾸준히 출판하고 있다”고 말한다. 동양 서적이 비록 많이 알려져 있지는 않더라도 간간하게 이어져 오는 이유를 가슴 깊이 느낄 수 있었다.

읽어야한다, 왜?

동양 고전을 왜 읽어야 할까? 이 물음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굳이 동양 고전에 주목하는 것은 의미없는 일일 것이다. 윤 교수는 “우리만의 인문학을 위해서”라고 말한다. ‘우리의 인문학’이라는 말이 민족주의적 혹은 전체주의적 사관에서 우러나온 것은 아니다. 우리는 줄곧 ‘세계화는 곧 한국화’라는 말을 들어왔다. ‘우리의 인문학’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플라톤이나 소크라테스를 시초로 하기보다는 신라시대 최치원부터 조선시대 정약용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이들로부터 시작한 인문학이어야 진정한 우리의 인문학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인문학이 중요한 이유는 ‘발언권’에 있다. 전세계를 무대로 무엇을 말하기 위해선 아류가 되어선 안된다. 그런 의미에서 윤 교수는 우리의 인문학을 꾸려 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책을 읽는 이유는 다양하다. 그만큼 책을 선택하는 이유도 다양하다. 하지만 우리가 선택하는 책의 범위는 의외로 협소한 편이다. 한 우물만 파라는 속담은 지식에서만큼은 통용되지 않는다. 대학생 시기의 지적 편협은 지성의 균형 잡힌 발전을 저해하기 때문이다. 한 쪽으로 쏠린 배가 앞으로 나아갈 수 없듯이 한 쪽으로만 기울어진 지성도 발전을 기대하기 힘들다. 지금까지의 교육은 서양 학문에만 치우쳐져 균형을 잡지 못했다. 그렇다면 동양 학문 교육에 힘써 학문의 조화로움을 추구하는 것이 균형잡힌 교육을 이뤄나가는 길이 될 것이다.

최지웅 기자 cacawo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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