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의 아픔을 간직한 한 마을을 찾다

지난 3월 22일 저녁, 제주도 서귀포시 남원읍사무소에서 ‘제주4·3희생자 유족회 남원읍지회’의 정기총회가 열리고 있었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가운데 저녁 7시가 되자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적게는 70세에서 많게는 80세를 바라보는 분들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회의실은 유족들로 가득 찼다. 이날의 주요 안건은 ‘4·3  제 60주년 위령제 참가 계획 건’이었다.

 ‘제 60주년…’ 4·3사건의 비극은 60년이란 세월을 빗겨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날 총회에서 만난 김홍석 할아버지(71)는 어릴적 겪었던 4·3사건의 아픔을 잊지 못한 채 간직하고 있었다. “음력 시월 우리 마을에 느닷없이 들이닥쳐 집들을 모두 불태워버렸어. 군경 합동작전이래. 의귀리, 우리마을인데…”

마을은 불타고 사람들은 학살당했다

1948년 11월 산에서 가까운 중산간 지대에 위치한 남원읍 의귀리를 비롯해 이웃마을인 수망리와 한남리 집들이 불타기 시작했다. 4월 3일 5·10선거를 반대해 12개의 경찰 지서를 습격한 후 한라산으로 올라간 무장대가 산쪽 마을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이유로 토벌대가 벌인 일이었다. 해안선에서 5km 이상 떨어진 중산간 지대에서 토벌대는 주민들을 총살했고 마을을 불태웠다. 일명 ‘초토화작전’이었다. 겁에 질린 의귀리 마을 사람들은 토벌대를 피해 산으로 도망갔다.

당시 11살이었던 김홍석 할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와 만삭인 어머니, 세 살 터울 여동생, 6살 남동생 그리고 네 살배기 여동생까지 여섯식구가 산으로 도망쳤다. 이후 그들은 땅굴 속에 숨어살았고 아버지가 구해주는 음식으로 끼니를 때웠다. 두달 즈음 지났을까, 근처에서 들려오는 총소리를 듣고 토벌대의 동정을 살피러 나간 아버지가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아버지를 찾으러 그는 어머니와 함께 굴 밖으로 나왔다. 순간, 어머니는 그의 등을 떠밀었고 소년은 뛰기 시작했다.

총을 든 군인 두 명이 눈앞에 있었다. 허벅지와 어깨, 손에 총을 맞아도 그는 뛰었다. 그렇게 그는 살았다. 그러나 잠시 후 뒤를 돌아보니 어린 형제들이 토벌대에 끌려가는 도중 총에 맞아 쓰러져 있었다. “여동생이 총 맞고 쓰러지는 걸 봤는데 살그머니 주저앉더라구. 몸부림 칠 힘도 없이” 만삭의 어머니는 토벌대에 끌려가 며칠 후 총살당했다. 그렇게 총살당한 사람이 트럭 두 대분이란 얘기가 떠돌았다.

미처 도망가지 못하고 마을에 남아있던 의귀리 주민들은 의귀국민학교에서 또다른 비극을 맞았다. 당시 의귀리는 주변 중산간 마을로 갈 수 있는 교통의 요지였고 토벌작전을 시행하던 제2중대가 의귀국민학교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들은 산으로 피하지 못한 백여명의 주민들을 의귀국민학교에 수용했다. 무장대와 관련없는 주민을 선별한다는 명분하에 이뤄진 작업이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무장세력과 관련없어 보이는 주민들은 해안 지역에 있는 남원리로 보낸다고 했다. 무장대들을 고립시키겠다는 토벌 작전의 일환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새벽을 틈타 무장대들이 국민학교를 습격했다. 학교 뒤편에서 격전이 벌어져 총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그러나 학교에 주둔한 군대를 상대하기에 무장대들은 역부족이었다. 습격은 실패로 끝났고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96명의 무장대가 사살됐다고 한다. 1949년 1월 10일 일어난 일이었다. 이틀 뒤 학교에 수용된 백여명의 주민들이 무장대와 내통해 습격을 도왔다는 이유로 총살당했다. 노약자서 부녀자, 어린아이까지 있었다.
 

마을 곳곳에 남아있던 비극의 흔적들

▲ 김홍석 할아버지는 우연히 유해가 남아있던 높은머루 학살터를 처음 발견했다. 발견 당시 상황을 설명하는 김할아버지의 모습
총살당한 희생자들의 시신을 묻었던 흔적은 마을 곳곳에 남아있었다. 마을을 가로지르는 서중천을 지나 신흥리로 가는 길을 따라가면 도로 옆에 자그마한 밭이 나온다. ‘현의합장묘’ 옛터이다. 의귀리 학살이 자행된지 1년이 지나고 현장에 방치된 시신들을 이곳으로 옮겼다. 지난 2003년 9월에는 이곳에서 유해발굴작업이 있었다. 39구의 유해가 뒤엉킨 채 발굴됐고 55년만에 추도식을 가졌다. 이들은 수망리에 있는 새로운 현의합장묘로 옮겨졌다.

 의귀국민학교 모퉁이에는 학교를 습격한 무장대들의 시신이 7년간 방치된 채 묻혀있었다. 이후 묘지 이전 작업이 시작됐는데 당시 16세의 나이로 작업에 참여했던 고기정 할아버지(71)는 “13구의 시체가 철모, 군화, 탄띠를 전부 착용한 상태였는데 철모 가운데로 다 총구멍이 뚫려있었어”라고 회상했다. 그렇게 13구의 시체는 학교에서 동쪽으로 걸어서 5분 정도 떨어진 ‘송령이골’로 옮겨졌다. 길가에 놓여있는 작은 봉분인 송령이골은 버려진 채 잡풀들만 무성했다. 이 작은 봉분에 어떻게 13구나 묻었냐고 물으니 “군화나 철모 다 빼놓고 뼈다귀만 가져다 조근조근 담아넣은거다”라고 할아버지는 말했다.

 의귀리서 수망리로 가는 길 옆 ‘높은머루’에서는 수많은 청장년들이 목숨을 잃은 채 발견됐다. 4·3사건이 일어난 다음 해였다. 마을 사람들은 이들을 무장대도 아니고 선량한 양민도 아닌 ‘애매한 사람’들이라 부른다. 무장대들과 내통했을 것이라 취조했지만 증거를 찾지 못해 학살당한 사람들이다. 참사현장을 처음 발견한 김홍석 할아버지는 “소들에게 풀을 먹이러 왔는데 보니까 한쪽에 전부 사람(유해)이야”라며 당시 상황을 전했다. 그러나 며칠 후 그가 다시 이곳을 찾았을 때는 자잘한 뼈들까지 수습해 사람의 해골만 남아있었다. 누군가 주민들에게 탄띠를 제공하며 뼈들을 가져오라 했다고 한다. 그는 “군수물자를 제공하며 수습한 걸 보니 군인들이 증거를 없애기 위해 뼈를 받아간 게 아니겠느냐…”라며 말꼬리를 흐린다.

제주도는 여전히 아프다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로 시작해 근 7년간 수많은 제주도민을 희생시킨 4·3사건이 일어난지 60년이 흘렀다. 지금 4·3사건의 비극은 우리에게 근현대사 교과서의 몇줄로 기억될 뿐이다. 그러나 제주도에서 4·3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은 비극이다. 제주도의회 ‘4·3특별위원회’의 피해조사 내용에 따르면 4·3사건으로 피해신고를 접수한 희생자는 1만5천95명이다. 당시 민간인 희생자가 3만명이라고 추정되고 있음을 고려할때 많은 이들에 대한 보상은 여전히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4·3사건의 희생자 유해발굴사업도 진행 중이다. 지난 2003년에는 의귀리 현의합장묘 유해발굴이 이뤄졌고 지난 2007년에는 제주국제공항에서 희생자 유해발굴사업이 이뤄졌다. 107일간의 작업 끝에 54구의 유해가 발굴됐다. 하지만 여전히 발굴돼야 할 수 많은 곳들이 남아있다. 의귀리만 하더라도 송령이골 유해발굴 작업이 이뤄져야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아픈 것은 살아남은 사람의 마음인지라. 가족들과 뿔뿔이 흩어져 생사를 알 수 없게된 그 마음은 여전히 치유할 길이 없다. 4·3사건의 회오리 속에 동생들과 어머니를 한순간에 잃은 김홍석 할아버지는 말한다. “한 많은 나의 꿈 언제 이뤄지겠습니까”

글 김용민 기자 sinsung704@
사진 김기람기자 super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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