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7년 9월 버마의 민주화 항쟁 시위가 국내 언론에 보도됐다. 버마를 모르던 사람들도 그들의 민주화 시위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버마의 민주화 항쟁을 바라보며 우리사회의 6월 항쟁을 떠올렸다. 그렇게 버마의 민주화는 6월의 기억을 공유한 이들에게 또 하나의 문제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는 버마와 함께하는 우리사회의 움직임을 촉진시켰다.

사건은 지난 2007년 8월 15일 버마의 군사정부(아래 군부)가 기름값을 거의 두배로 올리며 시작됐다. 연료비의 급등으로 생활이 어려워지자 버마의 시민들은 하나 둘씩 거리로 나왔다. 뒤이어 9월 5일 파콕구시에서는 기름값에 대한 승려들의 항의 시위가 있었다. 그러나 시위를 해산시키는 과정에서 군부는 승려들을 연행했고 시민들은 반발했다. 4일 뒤 총승려연합회는 군부에게 △9월 5일 군부의 시위 탄압에 대한 사과 △기름값의 인하 △군부와의 대화의 장 마련의 요구안을 내세웠다.

기한은 9월 17일까지였다. 다음날인 18일은 군부가 쿠테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지 19년째 되는 날이었다. 이는 군부가 세가지 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그들이 정권을 잡은 날, 자신들이 거리시위에 나서겠다는 총승려연합의 강력한 의지이기도 했다. 그러나 군부는 끝내 총승려연합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렇게 지난 2007년 9월 18일 수만명의 승려과 시민들이 버마의 거리로 나왔다. 2~3만명의 승려들과 10만명의 시민들이 함께했다. 외신이 이들의 움직임을 보도했고 수많은 버마 민주운동가들도 버마의 민주화를 해외에 알리기 시작했다. 전세계가 이들을 주목했다.

버마의 민주화 항쟁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이들의 민주화를 향한 열망은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6년간 집권해온 네윈 군사정권과 열악한 경제상황에 불만을 갖고 있던 버마 민중들이 1988년 8월 8일 민주화를 요구하며 거리시위에 나섰다. 당시 민주화 운동의 중심에 있었던 아웅산 수지 여사는 버마 사회의 민주지도자로 떠올랐다. 그러나 민주화 시위가 한창 확산되던 9월 18일 또다른 군부가 다시 쿠테타를 일으켰고 버마의 민주항쟁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리고 19년이 흘러 2007년 9월 다시 대규모 민주화 항쟁이 일어났다.

지금 버마는 세계 각국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군부를 정치·경제적으로 압박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기 때문이다. 특히 버마 민주화 세력이 한국에 갖는 기대는 특별하다. 한국과 버마는 비슷한 역사적 경험을 가지고 있다. 1945년 일본으로부터 한국이 독립했던 것처럼 1948년 버마는 중국으로부터 독립했다. 쿠테타로 군부가 정권을 잡은 것도 유사하다. 한국은 61년 박정희가 쿠테타를 일으켰고 버마는 62년에 네윈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20년이 넘는 독재의 경험도 두나라가 갖는 공통점이다. 다만 한국이 ‘5.18 민주화 항쟁’이 일어난 지 7년 만에 민주주의를 정착시킨데 비해 버마는 1988년 민주화 항쟁 이후 19년 동안 군부의 정권을 받아야했다. 아웅산 수지 여사를 중심으로 하는 민주운동 세력인 버마민족민주동맹(아래 NLD)의 내툰나잉 총무는 “비슷한 경험을 공유한 한국 사회가 버마의 민주화에 그 어떤 나라보다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 말했다. 1999년에는 경기도 부천시에 NLD 한국지부가 세워졌다. 군부의 탄압으로 태국과의 국경지역에 본부를 두고 있는 NLD는 현재 일본, 미국, 영국, 호주 등에 9개의 해외지부를 두고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사태의 심각성과 달리 버마를 향한 한국정부의 움직임은 여전히 소극적이다. 내툰나잉 총무는 “버마의 민주화를 위해 한국정부는 한 일이 없다”고 말한다. 일본정부가 버마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한국시민사회의 움직임만으로 버마 군부의 민중탄압을 저지하기 힘들다. 버마 민주화의 실현을 위해선 정부의 적극적인 움직임이 필요한 시점이다. 버마의 시민들은 민주화를 갈망한다.

/김용민 기자 sinsung704@yonosei.ac.kr
/자료사진 버마 민족민주동맹 한국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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