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가 속 수북히 쌓인 먼지를 털어내며,

『반지의 제왕』, 『해리포터 시리즈』는 2000년대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세계를 뒤흔든 문화콘텐츠다. 두 작품 모두 누구나 제목만 들어도 알만한 베스트셀러가 됐고, 영화로도 큰 성공을 거뒀다. 마법과 전설 속 동물들이 등장하는 환상적인 이야기들은 독자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데 충분했다. 작가는 상상의 나래 속에나 있을 법한 일들을 글로 써내려 가고, 독자는 그런 상상을 실컷 즐기는 것이다. 하지만 그다지 달갑지 않은 것은 이 작품들이 모두 ‘MADE IN THE WEST’라는 사실이다.


 세계적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환상문학 작품들이 대개 서구의 상상력에 의존하고 있다는 현실은 우리에겐 매우 서글픈 일이다. 작품성과 대중성을 입증하며 날개 돋힌 듯 퍼져나가는 서양 환상문학에 견줄 만한 동양 환상문학은 없는 걸까?


 전설 속에 등장하는 머리에 뿔이 달린 말과(科)로 열에 아홉은 ‘유니콘’을 떠올릴 것이다. 유니콘이 틀린 답은 아니지만 동양에도 이 질문의 답이 될 만한 신화 속 동물이 존재한다. 『산해경』에 나오는 ‘유유’가 바로 그것이다. 뿔이 하나뿐인 유니콘과는 달리 유유는 네 개의 뿔과 양의 눈, 그리고 소의 꼬리를 갖고 있다. 이렇게 우리가 절대적으로 ‘유니콘’을 떠올릴 수 밖에 없는 것은 서구 중심적인 지식을 공부해 왔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동양의 지식과 고전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부족했던 측면이 있다.

신화에 바탕을 둔 환상문학

 중국의 가장 오래된 신화·지리서인 『산해경』은 연대와 작자가 확실하지 않다.  『산해경』과 『반지의 제왕』, 『해리포터 시리즈』는 놀랍게도 모두 ‘신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화여대 중어중문과 정재서 교수는 “서양의 환상성(幻想性)은 주로 신화를 중심으로 한다”고 설명한다. 『반지의 제왕』을 쓴 JRR. 톨킨은 고전을 공부한 학자였고, 『해리포터』 저자인 JK. 롤링 또한 불문학을 전공했다. 두 저자 모두 학자로서 신화에 대한 접근성이 충분했던 것이다. 『반지의 제왕』은 북유럽 신화를 주요 원전으로 하고,   『해리포터』의 주 소재인 마법은 중세시대 마녀들과 신화 속에서 등장했던 동물들과 밀접한 연관을 맺는다. 이렇듯 서양 환상문학은 신화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서양만이 풍부한 신화를 가지고 있진 않다. 동양 문화권에서도 신화적 이미지의 양은 서양에 지지 않는다.


 신기하고 기묘한 동물들이 즐비하는 『산해경』에서 우리는 신화적 이미지를 찾을 수 있다. 또한, 기이한 재주를 지닌 고승들의 이야기나 효행설화가 실린 『삼국유사』는 역사서로 알려진 데 비해 환상적인 신화 이야기를 많이 담고 있다. 하지만 이런 신화 속 동물이나 인물들이 그리스·로마 신화만큼 체계적이고 구조적인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이 약점이다. 이런 이야기 구조를 뒷받침해줄 수 있는 대안책으로는  『태평광기』를 들 수 있다. 『태평광기』는 중국 북송 초 태종의 명령을 받은 이방(李昉)이 다른 12명의 학자들과 함께 완성한 필기문학전집이다.『태평광기』는 대분류 92개에 총 7천여 개에 달하는 이야기를 모아둔 책이라 구조가 다양하고 탄탄하다. 뿐만 아니라 환상적인 이야기들도 담고있다. 『태평광기』를 완역한 우리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김장환 교수는 “『태평광기』는 중국 필기문학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며 “그만큼 이야기들이 많고 내용도 풍성하다”고 말했다.

다양한 문화콘텐츠 활용


 동아시아의 중국, 일본, 한국 중에서 환상문학의 계보를 잇는데 소흘한 나라는 한국 뿐이다. 중국의 경우 환상적인 이야기와 신화가 이어져 몇 편의 대저작들을 남겼다. 『서유기』, 『봉신연의』 등의 환상문학들을 남긴 중국은 이후 환상성에 도교적 영향을 받은 무협소설을 창작해내기에 이르렀다. “무협소설이 단순히 책방의 한구석을 차지하는 고물이 아닌 세계적인 작품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영화『와호장룡』의 성공을 통해 볼 수 있다”고 정 교수는 말한다. 일본의 경우 미야자키 하야오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하울의 움직이는 성』 등 요괴 신화에 바탕을 둔 애니메이션이 큰 성공을 거뒀다. 또한 최근에는 『서유기』, 『봉신연의』 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 일본과 우리나라에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는 환상성이 잘 표현된 문화콘텐츠가 거의 없는 실정이다. 90년대 말 소설 『퇴마록』, 최근 드라마 『태왕사신기』 정도가 동양적인 환상성을 잘 표현한 작품으로 꼽을 수 있다.  근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이상의 『날개』와 같은 작품도 환상문학의 계보에 속한다. 현대의 작가들의 동양 ‘판타지소설’은 대부분 서구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쓰인다. 하지만 우리나라에도 풍부하고 충분한 신화가 있고, 드라마 『태왕사신기』처럼 이른바 한류(韓流)를 이끌어낼 만큼 완성도 있는 작품을 만들 수 있다. 다양한 문화콘텐츠를 활용해 오래된 서가에 묻혀있는 동양 환상문학 소재를 끄집어내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그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김장환 교수는 그 이유로“『태평광기』와 같은 고전이 대중화되지 않았다”는 것을 꼬집는다.  그런 고전을 찾는 소수 계층은 있지만, 대중이 그것을 원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정 교수는 “상상력의 정체성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앞선 질문에서 우리 모두가 유니콘을 떠올릴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우리들의 상상력이 서구적 상상력, 곧 지역적으로 편중된 상상력에 길들여져 있는 것을 증명한다. 그리스·로마 신화에만 익숙해져 있다는 것은 서구적 사고에 익숙하다는 것을 뜻한다. “인문학적 능력과 고전읽기 교육이 상상력의 뿌리가 된다”는 정 교수의 말처럼, 동양 고전 교육에 힘써야 한다.


 같은 신화적 뿌리를 가지는 한중일 세 나라 중  중국과 일본은 각자 자신만의 색깔을 만들어 가고 있다. 무협소설과 요괴신화라는 맛깔나는 요리로  소비자들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는 것이다.  우리도 풍부한 신화적 재료를 밑바탕으로 특별한 맛을 가진, 동양의 『반지의 제왕』이 만들어지길  한껏 기대해본다. 전세계가 우리나라의 진정한 환상의 멋을 알아주고 박수쳐주는 그 날을.

/최지웅 기자 cacawo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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