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밑에 있는 오래된 아파트. 두꺼운 철문을 마주하고 초인종을 누른다. 아무런 기척이 없다. 기다린다. 시선이 허공을 헤매다 문 옆에 붙어있는 가스 점검표에 머문다. 옆집에 반도 안 되는 숫자. 그 순간 ‘왜 이렇게 늦게 와’라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린다.

그곳은 김점선의 세계였다. 어둡다. 난방도 거의 하지 않는 모양이다. 코끝이 시리다. 터널처럼 길고 깊다. 동굴 속이다. 김점선이 ‘안경이 어딨지?’ 하며 두리번거린다. 나도 따라 시선을 옮긴다. 테이블 위에 놓인 말라 비틀어진 귤, 벽 안쪽에 비스듬히 세워진 캔버스, 무질서하게 쌓여 있는 책들. 어느 것 하나 정리되어 있지 않다. 김점선은 ‘아무데나 앉아’ 하며 자신의 컴퓨터 앞에 앉는다. 어디에 앉을지 막막하다. 일단 의자를 꺼내와 늘어져 있는 책들 위에 노트북을 올린다. 그가 불을 켠다. 갑자기 환해진다. 동굴에 불이 들어왔다. 모든 게 드러난다. 나도 불을 밝히고 그의 모든 것을 알고 싶어진다.

‘아무거나 물어봐’ 그가 말한다. 당당하다. 큰 키 때문인지 압도 당한다. 항암치료 중이라 머리가 까끌하다. 널어져 있던 까만 비니를 찾아 쓴다. 사진으로 봤을 때 보다 조금 야윈 모습이다. 아무거나 물었다. ‘우리 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작품이 걸려 있는걸 아느냐’ 했더니 기억이 없단다. 그러더니 ‘김진영 교수한테 벽에 붙이라고 그림을 좀 줬어. 옆방이 마광수 방이라길래 같이 놀아라하고 줬거든. 그래서 그게 거기 걸렸나 보다’한다.

 

김점선의 이력은 다양하다. 대학 졸업하고는 통역을 했고 홍익대 대학원에서 미술을 전공한 후로는 화가의 길을 걷고 있다. 실험영화도 만들었고 글도 쓴다. 직접 쓴 책이 8권이다. 얼마 전까지는 인터뷰어로도 활동했다.

미술과 영어, 이 '어울리지 않는' 조합에 물었더니 이야기가 길어진다.

“요새 애들은 취직하려고 영어공부하지? 나는 비트족이 되려고 영어공부를 했어. 비트족이 뭔지 모르지? 비트 문명은 미국의 물질주의에 반발해서 이렇게 살아서는 안된다고 해서 나왔어. 돈 버느라 헉헉 거리며 살기만 하면 인생이 너무 치사하잖아. 고등학교 2학년 때 비트족을 소개하는 칼럼을 봤는데 그 칼럼으로 인생을 바꿨지. 나는 미국에 가서 비트가 될 것이다. 일생의 진로를 결정지은 거야. 근데 그때는 미국에 가려면 4년제 대학을 졸업해야 했거든. 그래서 대학을 갔어, 대학 때 영어공부만 했어. 아무것도 안하고.

 

그럼 그의 인생에서 미술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림을 잘 그렸어. 6.25전쟁이 나서 마산으로 피난을 갔는데 아버지가 크레용하고 스케치북을 주워 왔어. 아버지가 항상 잘 그렸다 그래서 긍지를 느끼는 거 있지. 그런 마음이 있으니까 그림을 대할 때 쭈뼛함 이런 게 없어. 자신감이 넘쳐서 늘 잘 그렸어. 근데 고등학교 때는 미술반에 들어가기가 싫었어. 젊었을 때는 머리를 써서 어느 정도 지적인 발달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

대학을 다니다가 학교를 관두는 것에 대한 공포 때문에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는데 대학원엘 갔어. 대학원에서 듣기 싫은 과목을 2개 안 들어서 제적을 당하니까 진짜 아무 할 일이 없잖아. 그러다 아는 선교사 분 소개로 통역 일을 3년 했어. 인생에서 무엇을 선택하는 걸 유보했던 거지.

그러다가 나이가 혼기가 찼잖아. 친구들은 집에서 다 선을 보고 와서 일주일 전만에도 모르는 사람이랑 평생 살라고 하니까 미치겠다고 하면서 죽자는 얘기가 나왔어. 나도 지겨우니까 죽겠다고 했고. 다음날 만나서 죽기로 하고 그래도 태어나 하고 싶었는데 못한 것을 써가지고 말로라도 하고 죽자고 했어. 근데 그때까지 내가 뭘 하고 싶었는지 몰랐던 거야. 누워서 한참 생각하니까 미술이 동 떠올라. 그래서 친구들한테 안가고 미술학원에 등록했어. 미술을 해보고 그때도 지겨우면 그때 죽자고 다짐했지. 근데 친구들 다 안 죽었어.(웃음) 그래도 친구가 죽자고 해줘서 화가가 된 거야. 인생의 결정을 안 내리고 철학적으로 자기에 대한 성찰이나 이런 걸 스스로 해본 적이 없었어. 그때가 27살쯤이었어.”

지금 우리와도 다르지 않은 고민이다. 대학을 결정할 때나, 직업을 결정할 때 나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한 적이 있었는지 되돌아본다. 부모님이나 다른 사람들이 ‘뭐가 좋다’고 하면 ‘그런가?’하면서 따라가지는 않았는지, 내가 태어나서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가? 여전히 명확한 답이 없다. 그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고 계속된다. 오히려 시작에 불과했다. 화가로서의 길을 가는 김점선의 2막이 오른다. 그리고 3초 만에 결정한 결혼 생활도 이때 시작된다.

“미술대학원에 다니면서 친구들과 뭉쳐 다니고 놀다가 어떤 사람이 나와 친구들을 비판했어. 부모가 주는 돈으로 물감사고 부모가 준 물감을 캔버스를 바르는 게 그림이냐. 이러는 거야. 눈물도 땀도 없다는 거야. 그러면서 진짜 가난한 사람이랑 결혼을 해서 살아봐야 진정한 예술을 할 수 있다고 했지.

그때부터 한달 후에 결혼을 했어. 우리 남편은 망나니여서 집에서 쫓겨나서 우리 선배나 화실에서 빌붙어 살았어. 꼬라지를 딱 보니까 그지야. 저거면 되겠다. 그래서 결혼했어. 그냥 살았어. 진짜 얼마나 가난한지. 그래도 나이가 육십이 넘으니까 말을 할 수 있는 건 고난에 처했을 때 원래 목적에 맞지 않게 쉬운 길로 가면 죽는다는 거야. 창자가 달라붙을 만큼 배고프게 사니까 사람들이 번역을 해라, 그럼 돈을 벌잖아 그랬거든. 근데 그럼 내가 화가가 되겠냐. 그래서 차라리 장엄하게 죽겠다 그랬지.

그러다 그림이 오만원에 팔렸어. 그래서 그 돈으로 제일 싼 쌀을 사고 된장을 얻어다가 산에서 풀뜯어서 넣어 먹었어. 캔버스 살 돈이 없어서 목재사에서 판을 사다가 광목을 사서 발라서 연필로 그렸어. 물감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색 하나만 사고. 색 하나만 어떤 요소에 칠해가지고 알타미라벽화 같은 원시화를 그렸다니까. 그렇게라도 쉬지 않고 그린 거야. 그러면서 사고를 압축적으로 하는 거지. 한 색만 칠해도 그림이 그리는 거야. 그렇게 그림을 그리다가 돈이 떨어질 때쯤 되면 또 한사람이 와서 그림을 사가고.

그러다가 일 년쯤 지나니까 소문이 나서 가난에서 벗어났어. 5년 후에는 베스트 셀링 작가가 됐어. 나중에는 안 팔려고 집에 없는 척하고. 돈이 싫은 게 아니라 사람들이 그림 사러 오면 그 시간동안 그림을 못 그리고 사고도 못하고 작가로서의 생애가 뺐기는 거야. 그릴 시간이 없어지고 파는 시간만 생기는 거지. 인생이 너무 쉬운가? 고생한 건 2,3년 밖에 안돼. 생을 살면서 중요한건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되 틀리지 않는 방향으로만 나가는 거야. 화가로 한번 칼을 뺐으니까 그림을 그리다 죽겠다. 이런 정신이 중요하지.”

 

그의 얘기를 듣고 있자니 단단함이 느껴진다. 자신의 길에 대한 확고한 믿음, 그리고 어떠한 시련에도 흔들리지 않는 뚝심. 비바람에도 떨어지지 않고 열매가 된 옹골진 밤알 같다. 하지만 그에게도 이겨내기 어려운 시련이 찾아오는데 그것은 오십견이었다. 어깨가 아파 그림을 그리지 못하게 된 김점선, 하지만 그는 그 단단함으로 또 그만의 방식으로 그 시련을 극복한다. 10cm크기의 작은 타블렛을 통해 디지털예술을 시작했다. 사진 위에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또 그렇게 그려진 그림을 무한정 복사해서 나눠줄 수도 있다. 디지털 예술의 매력을 묻는 나에게 “안 해봐서 그런 걸 묻는 거야. 말이 필요 없어”라며

“기가 막힌 게 콕 찍으면 콱 나오잖아. 보름 걸릴 그림이 2초만에 돼. 인간의 사고를 손이 못 따라 오잖아. 이건 생각의 속도만큼 그림이 팍팍팍 나와. 사실은 ‘공학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해. 디지털 미술은 저작료만 포기하면 원본은 그대로야. 억만장을 뽑아도. 얼마나 좋냐. 중세에서는 메디치가만 예술을 누렸는데 지금은 누구나 인쇄해서 그림을 방에 붙이고 낙서하고 그런 게 가능해 진거지. 디지털 예술은 자유로운 사유를 위한 시각적인 도구야.”

 

그림이야기가 나오니 눈을 번뜩인다. 난방도 하지 않는 방안이지만 열이 나는지 옷을 한 겹 벗는다.

“내 그림이 굉장히 비싸져서 돈이 많은 사람이 사. 돈이 많아서 많이 누린 사람들이지. 근데 내 그림은 보육원, 유치원, 가난한 동네에 걸려야 해. 돈 없는 사람을 문화를 향유를 못하잖아. 내 그림은 프린터로 뽑을 수 있지. 나는 내 그림 상업용으로만 안 쓰면 안 잡아가. 인쇄 뽑아서 보면 진짜 그림은 아니지만 그래도 사물을 보는 눈을 깨칠 수 있잖아. 마구 뽑아서 책상에도 붙이고 침대 맡에도 붙여두고 아이들이 위에다 낙서도 할 수 있게 그렇게 자연스럽게. 박수근 그림이 달력에 막 나오고 여고생들이 선물로 그림을 주고받을 수 있어야 해.”

정말 그렇게 그림이, 예술이, 거창한 이름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신문지처럼 주변에 가까이 있고. 미술관을 가는 게 놀이공원에 가는 것처럼 되는 그런 세상을 꿈꾸는 김점선, 막 인쇄하고 여기저기에 붙이라는 그의 말에서 그림 앞에 완전히 노출된 삶을 상상한다.

‘이정도면 됐지?’를 세 번이나 하고 나니 인터뷰가 끝났다. 쉴 새 없이 말을 하던 그에게 노트북을 닫으면서 가지고간 책을 내밀며 싸인을 부탁했다. 이름을 쓰고 그림을 그려준다. “글씨가 선생님 같아요.” “응.” 아래에는 말을 그린다. “말을 가장 좋아하신다고 들었어요” “응, 이대에 붙고서 아버지랑 큰집에 인사드리러 갔는데 그때 어떤 여자가 말을 타고 지나 가는거야. 그 시대 다른 양반들 같으면 여자가 앞장서 간다고 투덜댔겠지만 우리 아버지는 나도 너를 저렇게 키우고 싶었다고 말했어. 그때 말이 확 나에게 다가 왔지. 내가 원래 과장이 심하고 뻥튀기를 잘 해. 그래도 나는 그때 아버지가 세상의 모든 말들을 나에게 선물했다고 생각했어.”

가방을 챙겨들고 신발을 신으려는데 ‘귤 가져가.’란다. ‘어차피 혼자 있으면 다 못 먹어. 많이 챙겨가.’ 쭈그리고 앉아 귤 상자를 뒤적인다. 자취한다고 했더니 더 챙겨준다. ‘더 가져가.’ 가방이 빵빵해졌다. 그의 마음 같아서 감사하다. 감사하다는 인사를 꾸벅 하고는 몸을 돌려 문을 여는데 현관 가운데에 떡하니 서서 ‘잘 가셔.’하며 손을 흔들어 준다. ‘또 놀러와.’라고 하는데 동굴을 지키는 문지기 같다. 선하게 웃는 그의 얼굴이 닫히는 문 사이로 보인다. 문이 닫히자 멍하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딴 세상에서 나온 것 같다. 하긴, 한시간 반 동안 김점선의 ‘동굴’에 있었지. 그는 이제 잠을 자겠지. 해가 지면 자고 뜨면 일어나신다는데. 나에게 보여준 따뜻한 웃음처럼 편안히 잠드시겠지.

/글 유나라 기자 missu@yonsei.ac.kr

/사진 조형준 기자 soarer@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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