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1년 프랑스 작가 쉴리프뤼돔이 처음으로 수상한 노벨문학상은 스웨덴의 발명가이자 기업가인 알프레드 노벨이 증여한 기금에서 출발해 지금은 세계 최고의 권위 있는 문학상으로 손꼽힌다. 작가에게는 작품의 우수성을 인정받는 더 없는 영광으로, 해당 국가는 세계적인 작가를 배출했다는 자부심이 되는 노벨문학상은 오랜 전통만큼이나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아왔고,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다. 해마다 노벨문학상 발표 시기가 되면 한국 작가의 수상 가능성을 점치며 앞 다퉈 기사를 쏟아내는 세태는 이러한 관심을 잘 반영한다. 하지만 이렇게 과도한 관심은 한편으론 노벨문학상에 버금갈 만한 국내 문학상의 부재를 의미한다.
문학상에는 스웨덴의 노벨문학상처럼 국제적인 것과 미국의 퓰리처상과 프랑스의 공쿠르상처럼 국내 작가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있다. 우리나라의 문학상은 대개 후자의 경우에 속한다. 또한 그 성격에 따라 신인 발굴을 위한  것과 중진이나 대가의 공로를 기리는 뜻이 담긴 것으로 나뉜다. 지난 1955년에 제정된 ‘현대문학상’을 시작으로 현재 국내 문학상은 그 종류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러나 오늘날 출판업계의 불황과 현대문학의 위기와 맞물려 문학상의 위상은 이전과는 크게 달라졌다. 신예 작가에게는 등용문으로, 기존 작가에게는 명예의 표상으로 그려지는 문학상. 현대 문학사에서 문학상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 /그림 손혜령

예비 작가의 꿈, 문학상

“문학의 위기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회자돼 온 말”이라는 『문학사상』 강성욱 팀장의 말처럼 문학이 문화의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은 그리 길지 않다. 그러나 요즘처럼 우리나라의 문학이 위기 상황에 놓였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출판의 꽃으로 서점가 매출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문학작품은 어느새 뒷방 신세가 돼 물러났고, 그 자리를 각종 참고서적과 실용서가 채우게 된 것이다. 시나 소설이 읽히지 않는 사회에서 몇몇 인기 작가를 제외하고는 기존 작가조차 살아남기 힘들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도 꾸준히 신인 작가를 발굴하고, 기성작가에게 힘을 실어주는 문학상이 지속되고 있다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특히, 예비 작가를 꿈꾸는 문학도들에게 최근 늘어나고 있는 신인 문학상은 반가운 소식임에 틀림없다.
‘문학사상 신인상’의 경우, 올해부터 상반기와 하반기에 각각 신인상을 주고 있다. 이는 작가를 지향하는 작가지망생에게 보다 많은 문단 등단의 기회를 부여하고 좋은 작가들을 배출하고자 하는 취지다. 또한, 대산문화재단에서는 수년 전부터 ‘청소년 문학상’과 ‘대학문학상’을 설립해 문학계의 미래를 짊어지고 갈 신인 작가의 양성에 힘쓰고 있다. 대산문화재단 문화사업팀 박현준 대리는 “작년 대학문학상에 6개 부문에 걸쳐 약 천여 명의 지원자가 응모했다”고 말해 문학상이 예비 작가생들이 등단의 통로가 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난해 「연세춘추」에서 주관하는 연세 문화상을 수상한 전아리(불문·06)씨는 “문학상 수상이 창작 활동에 큰 용기와 희망이 됐다”고 말했다.
강성욱 팀장은 “신인상을 통해 등단한 작가들의 활동 여부는 각 작가의 역량에 좌우되는 경우가 크다”고 말한다. 서울의 각 문예지나 출판사들이 배출하는 신인상 출신 작가들의 수에 비해 문단에서 주목 받는 작가의 비율이 현저하게 낮은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박현준 대리 역시 “신인 작가들이 등단할 때만 반짝하고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현상은 작가들이 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 매체가 제한적이고, 기존의 문예지도 중견이나 인기 있는 작가들의 작품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인 작가의 끊임없는 창작 노력과 이를 마음껏 발표할 수 있는 매체를 확보하는 것이 시급하다.

다다익선(多多益善)의 폐해?

국내 문학상은 문화재단, 문인협회, 출판사, 신문사 등에서 주최한다. 국내에는 100여 가지가 넘는 문학상이 있지만 그 명성을 인정받고 있는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문학상으로 대표적인 것은 문학사상사가 제정하는 ‘이상문학상’, 대산문화재단의 ‘대산문학상’, 그리고 한국문인협회가 시상하는 ‘한국문학상’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는 우리나라 문학상이 지나치게 많다는 문제도 있지만, 문학의 어느 한 분야를 대표할 만한 상이 부재한 탓이 더 크다. 또한, 그간 단편소설을 대상으로 한 문학상이 많아 장편소설이 침체되고 독자들의 기호와 취향, 시대의 변화를 반영하지 못한 측면이 있다. 게다가 유명 문학상이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작가들을 중심으로 진행돼 지방 문인들이 소외돼 왔다는 것도 문제점으로 들 수 있다. 일부에서 제기되는 문학상의 객관성과 공정성의 의문도 풀어야 할 숙제다.
어찌 문학작품의 좋고, 나쁨을 혹은 서열을 매길 수 있을까. 1925년, 사르트르는 최고의 영예인 노벨문학상을 자발적으로 거부하기도 했다. 하지만 “문학상이 작가들에게 새로운 전기나 보다 좋은 작품을 쓰기 위한 도약의 계기로 작용할 수 있다”는 강성욱 팀장의 말처럼 문학상이 제 기능을 발휘할 때 문학계에 긍정적인 힘으로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노벨문학상은 이제 문학인들만이 아니라 문학을 사랑하는 전 세계 사람들의 축제가 됐다. 국내 문학상도 독자들과 유리된 ‘그들만의 잔캄에 그치지 말고, 작가와 독자가 서로 활발하게 소통하는 진정한 문학의 장으로서 우뚝 서야 할 것이다. 나아가 국내를 넘어 세계 독자들에게까지 널리 읽힐 수 있는 한국의 작품과 한국 작가들의 탄생을 위해 한국을 대표하는 ‘문학상’의 발전이 반드시 필요하다.

/강조아 기자 ijoamoon@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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