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철폐 계엄해제!”
1980년 5월 17일 광주 전남대학교. 교문 앞은 학생들과 이를 저지하려는 군인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유신철폐 계엄해제’를 외치는 학생들의 구호가 점점 높아질수록 민주화를 향한 열망도 점점 고조돼 갔다. 이 때 작전명 ‘화려한 휴갗로 무차별 진압은 시작됐다.
광주와 5.18민주화운동(아래 민주화운동). 27년하고도 4개월이 지난 9월 8일, 화창했던 날씨에 치열했던 민주화운동의 현장, 광주를 찾았다.

첫번째. 5.18국립민주묘지(아래 국립묘지) 민주화운동의 시발점인 전남대학교 앞을 들른 후, 국립묘지를 찾았다. 광주의 외곽에 위치한 국립묘지는 본래 망월동 구묘지에 있던 5.18민주화운동 유공자들의 묘들을 이장한 곳이다. 묘역의 입구에는 높다란 위령비가 자리하고 있었다. 묘지 앞에 놓여진 사진에는 어린아이부터 할아버지까지 다양한 얼굴들이 있었다. 갓 학교에 입학한 듯한 앳돼 보이는 소년의 비석 앞에서 동행했던 장선호(52)씨와 이삼현(60)씨는 “67년생이면 당시에 14살 이었겠구마…”라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이곳이 처음부터 국립묘지는 아니었다. 광주시가 관할하는 시립묘지였는데 지난 2002년에 국립묘지로 승격됐다. 국립묘지 관리과장 최경순(52)씨는 “오랫동안 투쟁한 끝에 얻어낸 결과”라고 말했다. 국립묘지로 승격된 후 5월 18일 열리는 기념식에 대통령이 참석함으로써 민주화운동은 우리나라의 근현대사의 일부분으로 공식 인정됐다. 최씨는 “아무래도 다른 달보다는 5월에 관심 대상이 되제. 특히 요즘은 대선이 있응께 정치인들의 방문이 많구마”라며 근황을 전했다. 광주시민 국강현(43)씨는 “광주가 정치적 수단으로 여겨지는 것이 씁쓸하다”고 말했다.
 

두번째. 망월동 구묘지

망월동 구묘지는 국립묘지가 생기기 전에 민주화운동 당시 숨졌던 시민들이 안장된 묘지다. 국립묘지와 가까운 곳에 있는 구묘지는 5.18민주열사들과 함께 다른 민주화운동 열사들도 안장돼 있다. 동문 이한열 열사의 무덤도 이곳에 있다. 처음에 이곳은 묘지가 아니라 시체를 버려둔 공터였다. 장씨는 “민주화운동 중 죽은 사람들은 그냥 여다 던져논거제. 눈에 잘 안띄게 하려고 일부러 이렇게 외진 곳을 골랐던 거고”라고 말했다. 이후 이곳은 묘역으로 정비됐고 현재 광주시가 관리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저기 보이는 무성한 풀들로 보아 제대로 된 관리는 별로 이뤄지지 않는 듯 했다.

세번째. 광주 MBC 옛터

입시학원 등의 새로운 건물들이 자리하고 있는 광주 MBC옛터는 남아있는 기념비만이 이곳이 사적지였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당시 광주는 완전히 고립돼 있었당께. 전화도 끊기고 중앙신문도 전혀 안들어왔고.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길에는 전부다 군인들이 바리케이트를 치고 있어서 외부와의 연락도 완전히 두절된 상태였제.” 장씨는 당시의 상황을 설명했다. 방송에서는 광주의 폭도들이 무차별하게 난동을 부린다는, 사실과는 다른 뉴스를 내보내고 있었다. 이를 본 광주시민들은 분노해 광주MBC와 광주KBS에 잇따라 불을 질렀다. 국내에서 고립된 광주의 상황을 제대로 전하는 매체는 어디에도 없었다.

네번째. 상무관, 금남로, 그리고 구 도청

시민들이 금남로를 가득 메운 채 ‘전두환은 물러가라 물러가라’를 외치던 곳, 영화 『화려한 휴갱에서 가장 치열했던 전투장소로 등장하는 곳이 바로 도청 앞 일대다. 구 도청 바로 앞에 위치한 체육관인 상무관은 시신들을 임시로 안장했던 곳이다. 상무관은 현재까지도 당시의 외곽을 그대로 유지한 채 체육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구 도청은 현재 경찰청 건물로 일부 개편돼 사용되고 있다. 높이 달린 시계와 낡은 듯한 흰색의 구식건물은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당시 도청일대의 진압은 영화 『화려한 휴갱의 내용 그 이상이었다. 당시 군인들은 시민들을 대상으로 형체만 보이면 구타하는 마구잡이식 진압을 했다. 그들의 진압무기는 대검, 몽둥이, 총 등 상상을 초월하는 것들이었다. 죽은 사람들 중에는 임산부도 있었고 심지어는 집안에 있다가 총을 맞아 죽은 사람도 있었다. 당시 이씨는 도청 근처의 한일은행 앞에서 택시를 타고 있던 중 갑자기 군인들의 공격을 받았다. 그는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며 말했다. “몽둥이를 들고 택시로 돌진해 유리를 깨고 다짜고짜 끌어내리더구마잉. 옷을 벗긴 다음에 2명이 달려들어서 마구잡이로 소잡듯 때려잡았제. 다행히 머리는 안맞았는데 온몸이 시퍼렇게 피투성이가 됐구마.” 21일 있었던 도청 앞 시위에 참여했던 장씨는 시위도중 가슴팍에 총상을 입었다. 장씨가 병원에 있을 때 그의 동생이 진압군으로 광주에 왔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동생을 직접 만날 수도, 아는 척을 할 수도 없었다. 이처럼 당시 시민들과 진압군의 관계는 형제조차도 남처럼 만들어버릴만큼 살벌했다.

   

다섯번째. 구 광주적십자병원및 전남대병원

도청에서 있었던 발포로 인해 거리는 눈깜짝할새 쓰러진 사람들로 가득찼다. 당시 광주에 있었던 병원들은 큰병원이든 작은의원이든 모두 피투성이가 된 사람들로 넘쳐났다. 장씨는 “병실이 다 차서 복도까지 사람들이 줄줄이 누워있었제.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당께”라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부상자들은 손볼 틈도 없이 계속 쏟아져 들어왔고 이중에는 이미 죽은 사람들도 부지기수였다. 구 광주적십자병원은 지금까지도 당시의 외관과 내부를 그대로 간직한채 개편돼서 운영되고 있다. 전대병원 본관의 외곽도 당시의 모습이 남아 있었다.
사적지를 돌아본 후 찾은 광주시내에서는 항쟁을 기억하는 장년층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민주화운동에 직접 참여했었다는 최삼규(47)씨는 “광주에서 민주화운동이 일어난 것에 대해 남다른 자긍심을 갖고 있다”고 했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점점 잊혀져서 젊은 세대들이 잘 모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 것 같다”며 세월의 한계를 실감하고 있었다.

민주화운동은 발생 이후에도 오랫동안 제대로 진상규명이 되지 못한 채 남아  있었다. 신군부의 집권하에서 민주화운동 관련자들은 계속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당했고 사망자들은 여전히 ‘폭도’라는 낙인을 벗을 수 없었다. 1988년에 국회에서 최초로 5.18관련청문회가 열렸으나 별다른 성과가 없이 끝났다. 이후 피해자들과 관련단체들이 수십차례에 걸쳐 고소, 고발했지만 계속 무산됐다. 사건이 있은지 15년이나 지난 1995년에 ‘5.18학살특별법’이 제정되는 것을 시작으로 비로소 사건에 대한 보상과 진상규명이 이뤄졌다. 전두환 전 대통령과 노태우 전 대통령은 각각 사형과 무기징역형이 확정됐고 1997년에 5월 18일은 국가기념일로 제정됐다. 교과서에도 ‘광주항쟁’대신 ‘5.18민주화운동’이라는 정식명칭으로 정정됐다. 하지만 두 전 대통령은 특별사면에 의해 수감된지 2년여만에 풀려났고 다시는 역사의 심판대에 오르지 않았다.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다.” 이 명제를 당연하게 말할 수 있게된지는 불과 20년이 채 되지 않았다. 수십년의 세월동안 수만명의 목숨이 희생돼왔지만 그 과정은 제대로 규명되지 못한 채 지금까지도 방치돼 있다. “아직까지 5.18을 잊지 않고 알리는 이유는 아이들에게 부끄러운 아버지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는 장씨의 말은 우리가 역사를 배우고 되새겨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보게 한다.

/글 김세정 기자 kjs17860@yonsei.ac.kr

/사진 김평화 기자 naeil@yonsei.ac.kr

-취재에 동행해주신 사단법인 ‘5.18민주화운동부상자회’ 조직국 국장 장선호(52)씨와 이사 이상현(60)씨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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